[삶의 향기-이지현] 감정의 뚜껑 기사의 사진
분노, 혐오, 미움…. 우리는 이런 감정을 나쁜 감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나쁜 감정은 정말 나쁠까?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반작용으로 나쁜 감정을 드러낸다. 상처를 분노와 짜증으로 표현하고, 상처받은 자존심을 미움이나 침묵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주로 밖으로 표출되는 소위 ‘나쁜 감정’에 대한 묵은 오해가 있다. 유튜브 조회수 10만건을 훌쩍 넘긴 플라톤 아카데미 인문학 강연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권수영 연세대 교수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감정은 ‘연대감’이고 가장 싫어하는 감정은 ‘거절감’이다.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한국인들은 거절당할 때 분노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분노라는 감정은 ‘나쁜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고마운 감정’이라고 했다. 왜냐면 내면의 감정을 알 수 있는 사인(sign)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끔 화(분노)가 날 때 ‘뚜껑이 열린다’는 표현을 쓴다. 뚜껑이 열리는 데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주전자 안에 뭔가 끓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는 관계 욕구가 좌절되면 더욱 자주 발생한다. 왜 그런 감정이 튀어나왔는지 알려면 뚜껑이 열린 주전자 안을 살펴봐야 한다.

감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는 감정이 있다. ‘원심력 감정’과 ‘구심력 감정’이다. 원심력 감정은 상대방을 향한 감정으로 분노, 미움 등이다. 구심력 감정은 자신을 향한 감정으로 불안, 염려, 수치심 등이다. 보통 친밀한 관계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원심력 감정인 분노가 발생한다.

이때 구심력 감정인 불안, 염려, 수치심 등이 주전자 안에 끓고 있는 것이다. 이 주전자 안의 감정을 우리가 상대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우린 분노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주전자 안의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면 분노는 폭발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분노로 인한 보복 범죄가 2010년 124건에서 2014년 255건으로 5년간 2배 이상 증가했다.

출근길에 난폭 운전자에게 거친 욕을 들었다면 하루 종일 불쾌하겠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보통 잊어버린다. 그러나 매일 얼굴을 보는 동료나 가족에게 그런 비난을 받았다면 상황은 다르다. 내가 그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그들로부터 받는 거절감의 상처는 너무나 크다.

분노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언어 습관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너 때문에 화가 나!” 또는 “당신 때문에 짜증 나!” 등은 잘못된 표현법이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엄마는 네가 네 방을 잘 치워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너도 알겠지만 엄마는 집안 모든 게 잘 정리 정돈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늘 있잖아. 그런데 그 바람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너무 불안해!” “당신이 아무 연락 없이 늦으면 무슨 사고가 난 것 같아 염려가 되고 불안해요.”

그러나 이런 속마음을 감추고 “방 치워” “왜 매일 연락도 없이 늦어요?”라는 상황만 이야기하면 뚜껑이 열리게 된다. 엄마의 분노에는 방을 어지럽힌 아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평소 바람 때문에 생기는 감정은 숨겨져 있다. 또 아내의 분노에는 남편의 늦은 퇴근 시간이 아니라 아무 연락 없이 늦어 불안해진 감정이 숨겨져 있다. 이런 감정을 잘 드러내면, 분노란 감정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지지 않는다.

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를 놓치면 관계는 더욱 나빠지고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내 안에 숨겨진 불안, 염려, 죄책감, 수치심, 소망, 희망 등의 감정을 발견하면 가족 또는 동료, 친구들과 나누는 것이 좋다. “너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어. 정말 미안해. 실은 내 안에 이런 경험이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많이 창피했던 같아”라고 자신의 속 감정을 솔직하게 공개하면 관계도 좋아지고 더욱 끈끈한 연대감이 생길 것이다.

이지현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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