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방] <84> 이윤택, 풀은 눕지 않는다 기사의 사진
극작가 이윤택
22년 전 나는 이윤택 선생의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의 문하에서 잠시나마 작가의 꿈을 키웠다. 춥고 가난했지만 즐기는 시절이었다. 극작가 이윤택은 당시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이자 작가였다. 거침없는 행보는 작품 속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예리했으며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불의에 맞서는 시민사회의 역동성은 그를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그래서 적도 많았다. 그의 날 선 일갈을 불편해했다. 그 부류는 대체로 기득권자들이었다. 이후 나는 방송작가로 전향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스승의 작품활동 소식은 반가웠다.

제자가 스승의 주변을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4년 전, TV에서 이윤택 선생을 보았다. 대선 후보의 찬조연설이었다. 의아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찬조연설을 하다니 놀라웠다. 평소 정치적 발언을 자제했던 인물이었다. 뼛속까지 연극인이었으니 정치적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연극을 통해 구현한 우리 시대의 예술가였다. 찬조연설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았다. 자신이 본 것과 경험한 것 외에는 어떤 조미료도 첨가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곳에 나섰는지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윤택 선생이 찬조연설한 그 대선 후보는 낙선했다.

얼마 전, 신문지상에서 또 그와 조우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이었다. 연극계 거장 이윤택이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창작기금 희곡 심사에서 100점을 맞고도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 그것이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연관되어 있다면 심각한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핍박받는 이윤택’이 수천 명에 이른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예술인들을 관리하고 길들인다는, 이 위험하고 저급한 발상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망국적 행위다.

풀은 눕지 않는다. 평정을 잃은 결속과 유지는 없다. 부당한 타협이 때로는 온전한 미래를 위하는 길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우리 후세들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일이다.

강태규(대중문화평론가·강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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