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역경의 열매] 윤경숙 <2> 연애시절 남편을 교회 못 가게 막았던 불신자

결혼 뒤 얼떨결에 교회 나가기 시작, 아픈 딸 위한 철야예배에서 환한 빛

[역경의 열매] 윤경숙 <2> 연애시절 남편을 교회 못 가게 막았던 불신자 기사의 사진
동생이 미술대회에 나갔을 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모습. 당시 윤경숙 이사장(앞줄 왼쪽)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나는 미션스쿨이었던 고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께 “채플에 참석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따진 것 외에는 그냥 평범하게 고교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대학에 가자마자 연애를 시작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나는 80학번으로 영남대 축산학과를 다녔다. 과에서 홍일점이었다. 축산학과를 통틀어 여성이 2명뿐이었다. 내가 축산학과를 택한 것은 평범하지 않은 대학생활을 원했기 때문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도 나에게 농대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여성이 드믄 분야에서는 조금만 잘해도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고 하셨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과 동기인 남편은 5대째 신앙을 가진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월남한 시할아버지는 신의주에 교회를 세우신 분이셨다. 반면 우리 집은 불교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절을 세웠다. 그렇다고 내가 독실한 불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을 교회에 못 가게 막았다. 연애를 하면서 남편에게 “교회 갈래, 나랑 놀래”라고 묻곤 했는데 남편은 늘 나랑 놀겠다고 답했다. 꼭 못 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의도적이었다. 남편은 내가 바빠 혼자일 때만 교회에 나갔다. 나중에는 내 스케줄과 상관없이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남편이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한동안 시어머니의 기도제목이기도 했다.

그러다 결혼 후 얼떨결에 교회에 다니게 됐다. 1987년 서울 목동으로 이사했을 때 옆 집 사람이 기독교인이었다. 나보다 몇 살 위인 옆 집 사람은 김치도 담가주고 커피도 주고, 언니도 그런 언니가 없었다. 속으로 ‘교회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8개월쯤 지났을 때 교회에 가자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을 데리고 교회에 출석했다. 남편도 그동안 교회 안 다닌 것이 편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주일예배는 물론 구역예배도 갔다. 그 언니가 너무 잘 해줘서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는 더 열성적인 기독교인을 만났다. 이사를 가기도 전부터 우리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분은 아파트 문에 교회 전도지를 붙여놓았다. 이삿짐 차에서 짐을 내리는데, 그분이 나타나 짐을 옮기는 것을 거들었다. 이사할 때 많이 도와주셨으니 그 교회에 몇 번은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천에 있는 은혜와진리교회를 다녔다.

그러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다. 89년에 태어난 딸이 기관지염을 앓았다. 천식으로 발전했다. 교회 구역장은 기도하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요철야예배에 갔다. 이전에 철야예배는 이상한 사람들만 가는 줄 알았다.

강단에서 목사님은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회개부터 하라고 했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지’ 싶었다. 주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어떤 이는 이상한 말로 기도했다. ‘마치 미친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입에서도 그들처럼 회개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멀리서 작은 빛 하나가 보였다.

처음엔 ‘교회 천장에 달려있는 샹들리에 빛인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잘못 보았나’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다시 숙였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빛이 다시 나타나더니 점점 크게 다가왔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문서선교 후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