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최순실 비자금 기사의 사진
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 후 검은돈을 보관하거나 뇌물을 주고받는데 애용된 것은 사과상자였다. 수표의 경로 추적이 가능해지면서 떳떳하지 못한 돈다발을 숨기기에 그만큼 유용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1만원권 지폐로 사과상자를 채우면 2억5000만원이 들어간다. 1996년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면서 쌍용양회 경리창고에서 1만원짜리로 가득 찬 사과상자를 발견했다. 61억원이었다. 그 이듬해 수서 비리 사건 때 정태수 한보 회장은 사과상자와 라면상자로 100억여원을 정·관계 인사들에게 뿌린 사실이 드러났다. 2002년 ‘차떼기 사건’ 때도 뇌물이 담긴 사과상자가 트럭이나 승합차로 한나라당에 전달됐다.

뇌물 액수에 따라 007가방, 골프 가방이 활용되기도 했다. 1999년 세풍 사건 때는 캐리어가, 2001년 ‘진승현 게이트’ 때는 골프 가방이 새로운 뇌물 용기로 등장했다. 2005년 마사회 임원 수뢰사건에는 안동 간고등어 선물함과 상주 곶감상자가 그 역할을 했다.

2009년 5만원권이 등장하면서 상자는 작아졌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건설업자로부터 현금이 든 와인상자를 받아 대법원 상고심에서 징역형이 확정됐다. 중견 가전기업인 모뉴엘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무역보험공사, 수출입은행 간부 등에게 뇌물을 줄 때 담뱃갑, 과자상자, 와인상자, 갑티슈통 등 다양한 용기를 이용했다.

몇 년 전에는 플라스틱 김치통에 담긴 5만원권 현금다발이 마늘밭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경찰이 굴착기까지 동원해 990㎡의 밭에서 110억7800만원을 찾아냈다. 수백만원 과태료나 체납세금을 내는 데 인색한 졸부들이 장롱 안에 수십억원 현금 다발을 쌓아놓았다가 들통 나 복장 터지게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사회가 투명해지고 감시 시스템이 촘촘해졌는데도 검은돈의 생명력은 질기고 은닉수법도 교묘해지고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 협조요청을 받은 독일 검찰이 최순실씨가 해외계좌를 이용해 거액의 재산을 은닉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하고 있다. 최씨는 자기 방과 딸 정유라 방에 있는 금고들 외에 두루마리 화장지 심에 수백만원을 감춰두고 썼다고 한다. 가욋돈이라도 생기면 가슴을 졸이며 아내 몰래 꿍칠 궁리를 하는 샐러리맨 입장에선 언감생심이다. 볼 일 볼 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두루마리 화장지가 이런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것도 새롭다.

글=이명희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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