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이동훈] “죽 쒀서 개 주지 말자” 기사의 사진
유엔 산하 미래연구 싱크탱크인 밀레니엄 프로젝트가 2010년 펴낸 ‘유엔미래보고서’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가 가져올 미래 변화에 대한 전망이 가히 획기적이다. 보고서는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존 국가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권력이 탄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권력독점이 사라지고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SNS 권력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심지어 이렇게 되면 유엔 같은 미국 등 서방국가 주도의 국제기구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엔에서 펴낸 보고서가 유엔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SNS 혁명의 위력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보고서가 내다본 새 권력은 다름 아닌 민중권력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보고서가 발행된 뒤로 공교롭게도 튀니지를 필두로 이집트 등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 아랍의 봄이 휩쓸고 갔다. 아랍의 봄바람에는 SNS가 있다. SNS를 통해 민중이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전망의 이면에는 소수 엘리트 권력의 소통부재와 그들만의 정치에 대한 불신이 전 세계적으로 팽배해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민주주의 수출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의 눈치보기와 러시아 등의 개입으로 절반의 성공에 그친 아랍의 봄이지만 민초들의 저력을 보여준 사건임에 틀림없다.

2016년 광화문광장에 쏟아져 나온 대한민국의 민초들 역시 정치권력의 판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을 놓고 어물쩍 넘어가려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광화문광장의 190만 함성에 놀라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 스스로 정치하는 시대가 출범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다.

유모차를 끌고, 교복을 입고 광장으로 나오는 이들은 그야말로 테이블 밑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경유착의 ‘꾼’이 아닌 생활인들이다. 정유라와 그의 모친 최순실 일당과 대통령의 국정농단을 통해 접한 민주주의의 끝없는 추락에 처음에는 수치스러워하며 분노했지만 시민들이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기득권을 무너뜨렸다. 촛불집회가 2개월 넘도록 진행된 지금은 시민들 스스로 어떤 나라를 건설해야 할지 대안을 찾아가는 모습도 보인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 1월 한 달을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국민대토론을 전개할 것을 제안한 것도 촛불집회가 단순한 감성 토로나 스트레스 해소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퇴진행동은 시민들이 일상에서 토론한 결과를 국민토크 홈페이지(www.citizen2017.net)에 게시하면 ‘100대 촛불 요구’로 분류하기로 했다고 한다.

정치권은 촛불 덕택에 마련된 선거판에서 새판짜기에 한창인 듯하다. 새누리당 탈당파는 임기를 마치고 다음 달 15일 귀국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기다리고 있다. 반 총장도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흉상의 코를 만지작거리며 새로운 권력쟁취의 ‘운발’이 닿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야권은 야권대로 10년 만에 찾아온 수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노라면 구태로 찌든 권력지형을 짜깁기하려는 건 아닌지 답답하다. 정치인들은 스스로 정치에 뛰어든 민초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야당 모 의원이 ‘죽 쒀서 개주지 말자’고 했지만 시민들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다. 시민들은 이번에야말로 여든 야든 정치권에 끌려다니지 않고 시민들이 바라는 사회를 끌고 가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광장에 모이고 있다.

이동훈 사회부장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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