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로 엄지로… 시민 곁으로 정치가 왔다 기사의 사진
한 손에 촛불을, 다른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었다. 시민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외쳐봤자 제 목만 아프지 그다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마른 자 우물을 판다고 국회의원에게 직접 '카톡'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모바일 메시지를 전송했고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청문회에서 거짓말을 한다고 제보했다. 마치 인터넷방송처럼 청문회 생중계를 보며 의원에게 카톡을 하면 텔레비전 속 의원이 메시지를 읽는 일이 벌어졌다. 그 순간 '나'는 비선실세보다 막강한 '랜선실세'가 됐다. 전인미답의 낯선 민주주의가 시나브로 시작된 셈이다.

유쾌한 ‘패러디모크라시’

시작은 미약했으나 당황스럽게도 끝이 창대해져 버렸다. 12월 2일 국회의원 전화번호가 유출됐을 때만 해도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공개된 전화번호로 박 대통령 탄핵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쏟아내자 해프닝은 신드롬이 됐다. 랜선(인터넷망)을 타고 정치적 의사표현이 터져 나오자 시민들은 ‘비선실세’를 패러디해 스스로를 ‘랜선실세’라고 불렀다.

랜선실세는 패러디를 무기삼아 짐짓 잰 체하는 반민주적인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탄핵 표결 전 “띵동띵동띵동! 탄핵 찬성해줘” “충성충성충성! 의원님 탄핵 찬성 좀 해주십쇼” 등 온갖 모바일 메시지를 받았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에게 “충성충성충성 장관님 사랑합니다 충성”이라고 보낸 이정현 전 대표의 문자 메시지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한 시민은 김무성 전 대표에게 영도다리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며 “무성군의 패기를 다시 보고싶어요!”라고 했다. 김 전 대표가 4·13총선 당시 친박(친박근혜) 진영의 공천학살에 반발해 당대표 직인을 들고 간 ‘옥새파동’ 당시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최근에는 헌법재판소에 박 대통령 탄핵 여론을 전달하는 ‘키친캐비닛’ 사이트도 등장했다. 박 대통령 탄핵 대리인이 최순실씨를 키친캐비닛(사설고문단)이라고 표현하자 이를 패러디해 “우리도 우리의 여론을 전달해 보자”며 개설됐다.

랜선실세는 정치를 놀이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어디에선가 누가 하고 있는 막연한 일’이 아닌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국회의원과 주고받은 카톡을 공개하며 “이거 진짜”라고 신기한 감정을 공유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에, 새누리당 장제원 의원은 한 시민과의 카톡방에 자신의 사진을 올려 시민들의 인증놀이에 호응했다. 먼 곳에 있던 정치가 시민 곁으로 다가왔다.

‘엄지 민주주의’

엄지손가락만 있으면 스마트폰으로 대화, 게임, 쇼핑은 물론이고 은행업무, 택시예약에 이어 심지어 가사도우미 호출도 가능한데 유독 정치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촛불시민들은 탄핵 정국에서 엄지손가락으로 정치를 ‘밀어서 잠금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엄지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는 토론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정치인이든 시민이든 서로 너나들이하며 수다 한 번 떨어보자는 뜻이다. 지난달 2일 개설된 ‘박근핵닷컴’은 탄핵 당일인 9일까지 무려 92만여명의 탄핵 청원을 받아 국회의원에게 전달했다. 원리는 단순하다. 시민들이 홈페이지에서 의원에게 ‘한 줄 메시지’를 작성하면 이메일로 전달된다. 의원은 탄핵 찬반 여부를 밝히면 된다. 시민은 나를 대의하는 의원이 정말로 내 뜻을 대신하는지 확인할 수 있고 의원은 자신이 대표하는 시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몇 번 톡톡 두드리면 끝난다.

정치 스타트업 ‘와글’과 소셜벤처 ‘빠띠’는 이런 방식으로 시민들이 일상에서 국회 입법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 ‘국회톡톡’을 만들었다. 시민이 직접 정책을 제안하고 1000명 이상 손가락으로 찬성 버튼을 누르면 해당 국회 상임위원회 의원에게 메일이 발송된다. 의원은 찬성 또는 거부 의사를 표시하면 된다. 최근에는 한 시민이 신입사원에게 연차를 보장해 달라는 입법 청원을 올려 1787명의 지지를 받았다. 해당 정책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에게 전달됐고 민주당 한정애 의원과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법령 개선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빠띠는 또 미시적 정책을 넘어 정치적 가치까지 온라인에서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디지털 직접민주주의 플랫폼 ‘우주당(우리가 주인이당)’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청소년 정치참여 캠페인 ‘틴즈디모’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책임을 묻는 ‘새누리당 해산·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빠띠 권오현 대표는 1일 “기성 정치인은 이익단체와 지역유지에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더 많은 시민의 목소리가 국회의원에게 다가가는 도구가 필요하다”며 “새로운 정치는 스타 정치인이 비전을 보여주고 시민들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작은 문제라도 해결책을 제안하면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사회가 변화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랜선실세’를 진짜 실세로

아르헨티나의 직접민주주의 소프트웨어 ‘데모크라시OS’를 만든 피아 만시니는 “21세기 인터넷 시대에 2세기 전에 고안된 정치시스템으로 무슨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국은 2008년부터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발표한 정보통신발전지수(IDI)에서 한 차례를 빼곤 매년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스마트폰으로 치킨 쿠폰을 주는 나라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선 정당이 당원을 관광버스에 태워 체육관에 데려와 전당대회를 연다.

낯선 미래가 현실이 된 나라도 있다. 스페인에서는 2011년 5월 마드리드 광장에서 정부의 긴축 및 쉬운 해고 정책에 반대해 ‘진짜 민주주의를 돌려 달라’고 외친 시민들이 ‘15M운동(분노한 사람들 운동)’을 주도한 결과 온라인 정당 ‘포데모스’가 탄생했다. 2014년 창당한 포데모스는 창당 1년 만에 총선에서 지지율 21%로 원내 3당에 올랐다. 랜선실세가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이들은 온라인에서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모으고 정책토론과 당 집행부 선출도 온라인 플랫폼에서 진행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선거운동을 온라인에서만 진행하는 ‘오성운동’이 지난해 로마 시장을 배출했다. ‘돈 안 드는 정치’를 모토로 전직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창당한 이 정당에서는 당대표가 자기당 후보 얼굴을 공천 이후에 아는 일도 벌어졌다. 당내 선거도 온라인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촛불민심을 담아내 정치를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제도권 정치가 반드시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와글 이진순 대표는 “핀란드에서는 6개월 이내에 유권자 5만명이 지지한 법안은 국회에 자동 상정되도록 개헌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는 600만명이 세월호특별법에 서명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제도권 정치에서 시민발안권, 국민소환제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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