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 한국의 길을 묻다] <1>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헬조선의 뿌리는 유교적 권위주의 촛불” 기사의 사진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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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석좌교수는 새해에도 불확실성은 대한민국을 시험할 것이다. 지난해 끝자락에 발발한 정치적 혼선을 매듭지어야 할 중차대한 과제도 올해 몫이다. 어떤 평범한 국민도 올해가 최소한 향후 한 세대의 삶을 좌우할 역사의 분수령임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거센 도전의 시기를 뚫고 나아갈 지혜를 국내 대표적 지성들로부터 시리즈로 들어본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철학자의 시각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우리 사회는 거대한 전환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가 형식적으로 됐지만 삶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곧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촛불시위가 드러낸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거시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유럽에서 우파(극우) 민족주의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 확산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파시즘적인 요소까지 있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포퓰리즘과 민족적 패권주의를 결합해 인기를 끌고 있다. 왜 민주주의가 위기인가. 근대를 규정해온 거대한 제도인 자본주의도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계층이동의 사다리도 작동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위기가 한국에서 이처럼 극적으로 표출된 이유는.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 중 선진국으로 진입한 유일한 사례가 한국이다. 진보·보수 등 정치적 이념과 상관없이 한국인들은 성장 이데올로기에 중독됐다고 생각한다. 관심이 경제적 성장에만 쏠려 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특히 이명박정부 이후 이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주요 동력이 그가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이었다. 박정희의 딸이기에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양극화, 사회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의 여파까지 가중됐다. 과거에는 분노와 불만이 컸지만 누구에게 분출해야 할지 몰랐다. 누적됐던 분노가 이번에 폭발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통해 우리 정치의 놀라운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현 체제로는 안 된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세계 10위권 경제국이고 6·10항쟁 등을 거치며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고 여겼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지난 2010년 9월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넘겼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이는 우리 사회 어느 부문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는데 서툴다. 특히 질문을 제대로 던지지 않거나 못 한다. 또 하나의 장면. 2015년 연두 기자회견 때 박 대통령은 배석한 장관들을 돌아보며 “대면보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이 말 자체가 권위주의이고, 대면 보고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자유롭게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하는 권위주의가 우리 시스템을 망가뜨렸다. 물으면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배신이라고 낙인찍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질문과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불렀다. 이런 점에서는 국민 누구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업에서도 상급자에게 자유롭게 질문하고 의견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팀제를 만드는 등 서구 경영기법을 도입하면 무엇을 하겠나. 토론이 안 되는 조직에 창의성이 나오겠는가.”

-질문과 이견을 꺼리는 문화의 뿌리는 무엇인가.

“유교문화다. 유교는 과거 500년간 정치적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지시하는 가치관으로 작용했다. 개인과 국가를 잇는 연결고리였다. 사회는 물질적으로 발전하고 민주화됐지만 유교적 가치관은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유교 문화는 위계로 개인들을 줄 세우고 누구의 아들·손자·친구, 어느 집안, 누구와의 관계 등 개인의 자질이나 덕성과 상관없는 특성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한다. 사적인 이해관계가 공적 영역에 개입토록 하는 것도 이런 전통적 가치관이다. 개인주의는 나쁜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이 법 앞에 평등하고 태어날 때부터 인간존엄의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개인주의다. 개인이 없으면 합리성도 생겨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기주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이기주의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서양의 개인주의는 나쁘고 우리의 공동체주의는 좋다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이번에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이러한 인식이 터무니없다는 게 드러났다. 최순실 게이트 연루자들의 행태는 집단이기주의, 가족이기주의, 연고주의일 뿐이다.”

-희망은 있나.

“최순실 사태에 뒤이은 촛불시위를 보고 희망을 품게 됐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태에서 위기보다 기회의 요소를 더 많이 봤다. 우선 광장에 나간 사람들이 정치권력에 동원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발적인 데다 평화적이었다. 두 번째는 어린이, 10대, 중장년층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층이 참여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이제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과거에는 광장에 대규모 군중이 모일 때 폭력적 충돌이 발생했다. 정권은 이를 빌미로 시위를 진압하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시민들이 이를 꿰뚫어 보고 자제하고 자제했다. 시민들의 행위 자체가 성찰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희망적이다. 마지막으로 초등학생, 중고생, 대학생들이 평화적으로 의사를 표명하고 권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것은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번 사태를 잘 극복한다면 우리는 한 단계 성숙한 민주주의로 이행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진우 석좌교수는 권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평생의 학문 주제로 추구해 온 철학자. 인간 실존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그 극단까지 철저하게 사유한 니체 철학의 권위자다. 2010년부터 이공계 특화 대학인 포항공대(포스텍)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융합, 소통을 추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테크노인문학’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 ‘이성정치와 문화민주주의’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위르겐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등이 있다. △2010년∼현재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2004∼2008년 계명대학교 총장 △1989∼2010년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 △1988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 철학박사 △1970년 연세대학교 독어독문과 졸업

배병우 편집국 부국장 bwbae@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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