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손봉호] 수치도 죄의식도 사라지는 세상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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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4대 미덕은 지혜, 정의, 용기, 절제였고 유교의 4대 미덕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였다. 공통되는 것은 지혜와 정의인데 이 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했다. 그런데 맹자는 정의를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수오지심)”이라 했다. 철두철미 주체 중심적 유교 윤리에서는 정의도 전적으로 주관적인 태도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심리학자인 톰킨스(Silvan Tomkins)는 ‘수치-창피’는 모든 인간의 생득적 정서 9쌍 가운데 매우 강력한 하나라 했다. 비록 무엇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왜 부끄러워하는가는 개인,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에게 양심과 수치심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수치심이 사람에게 해롭다는 주장도 있지만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취급할 만큼 수치감은 악행을 억제하는 중요한 도덕적 자원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厚顔無恥·후안무치)”라 하고, 심지어는 “쇠가죽으로 된 얼굴(鐵面皮·철면피)”이라 욕한다. 사람이 후안무치하게 되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원인이 작용하는 것 같다. 하나는 개인의 양심이 마비되어 옳고 그름을 가릴 만한 판단력을 잃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원인은 사회문화가 잘못되어 도덕적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는 충분히 수치거리인 행위가 전혀 부끄럽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거짓말이 예사로 인식되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것이 별로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최순실의 위치에 있었다면 최순실처럼 행동했을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최순실은 자신의 비리에 대해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것 같다.

양심의 가책과 수치를 유발하는 잘못의 기준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죄의식의 문화’와 ‘수치의 문화’를 구별해 왔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일본 문화에 대해 쓴 ‘국화와 칼’이란 책을 통해 많이 알려진 분류다. 일본, 한국, 중국 같은 동양문화에서는 수치심이 일탈행위를 억제시키게 하는 반면에 서양문화에서는 죄의식이 그런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수치의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의 따돌림을 무서워하고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인격적인 신이나 보응의 법칙에 의한 처벌을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수치는 주로 다른 사람 앞에서 느끼는 것이므로 무신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윤리적 자원이다.

수치의 문화에서 수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매우 유기적이고 인간관계가 친밀해야 한다. 우리나라 전근대 사회의 질서가 비교적 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념적으로 동질적이었고 인간관계가 친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심각한 처벌이었다. 일제 강점기 굶는 사람이 많았을 때도 대문과 잠금장치가 없는 시골마을에도 도둑이 거의 없었다. 공동체 구성원 간 상호 신뢰를 도둑질로 배신하면 따돌림을 당할 것이고 그것은 심각한 수치거리였다.

그러나 사회가 기계적으로 조직되고 인간관계가 익명적이 되자 수치는 윤리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는 죄의식의 문화보다 수치의 문화가 훨씬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인간관계가 익명적이 되어도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감시하는 ‘마음속의 경찰’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지만, 수치의 문화가 익명적이 되면 행동을 감시하는 ‘다른 사람의 얼굴’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범죄하고도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경우는 죄의식의 문화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수치의 문화에 살면 부정직해진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균적으로 유럽이나 미국의 비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부정직한 것 같다. 세계관과 문화가 개인의 윤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죄의식의 문화에서도 무신론이 확산되어 ‘마음속의 경찰’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두 문화에서 모두 법의 강제력만이 정의 유지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자율성에 있는데 외부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변화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속의 경찰로 모시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서 이렇게 타락하는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이 칼럼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와 함께합니다.

글=손봉호(서울대 명예교수·세계동역회 이사장),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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