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영석] 할리우드 텐 기사의 사진
영화 ‘로마의 휴일’(1953년)은 여배우 오드리 헵번을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헵번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지만, 아카데미 각본상은 엉뚱한 이가 받았다. 원작자는 돌턴 트럼보였지만 수상자는 이안 맥켈런 헌터였다. 미국 반공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흑역사였다.

1947년 11월 미 의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는 할리우드 영화산업계 종사자 43명에게 청문회 소환명령을 내렸다. 미 의회의 질문은 “당신은 공산당원인 사람을 현재 또는 과거에 알고 있느냐”였다. 청문회에 참석한 10명은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를 근거로 했다. 트럼보 등 10명은 의회모독죄로 기소됐다. 영화사 사장들은 이들 ‘할리우드 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324명이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1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11번이나 이름을 바꾸며 살던 트럼보는 ‘로마의 휴일’ 시나리오를 동료 작가 헌터의 이름으로 제작자에게 판매한 것이다. ‘로마의 휴일’ 각본상은 트럼보가 죽은 지 17년이 지난 93년 부인이 대신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이름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 70년대 이후 노조 운동이 활성화되자 탄압 수단으로 블랙리스트가 활용됐다. 문화예술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정권 시절 고(故) 백영호 작곡가의 ‘월급 올려주세요’는 최초의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가수 이장희의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이유로, 가수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말을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현재도 사정이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나 고위층 인사들이 줄줄이 특검 수사를 받고 있다. 정권 차원의 블랙리스트는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막겠다는 데 목적이 있다. 문화예술계가 이럴진대 다른 분야에는 없었을까 의문이 든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블랙리스트의 악습만은 이번 기회에 뿌리 뽑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기 정권을 잡은 이들이 또다시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 트럼보는 청문회에서 말했다. “‘네, 아니요’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나 노예일 뿐”이라고.

글=김영석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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