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4편>] 미국의 사도 바울… 실천적 영성으로 세상을 변혁시켜

<제4편> ‘오직 은혜로’ - (34) 조너선 에드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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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에드워즈가 24년간 목회했던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햄프턴교회 전경. 노스햄프턴교회 예배당 내부 모습. 교회에서 에드워즈가 사용했던 의자(왼쪽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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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오직 은혜로’를 시작하며

‘오직 은혜로(Sola Gratia)’는 인간이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의 노력이나 방법을 통해 참된 믿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와 죽음에서 구원한다. 조너선 에드워즈를 비롯한 미국의 부흥가,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뿌리를 찾아 나선다.

“제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빼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근대 영성의 아버지 마틴 로이드 존스가 한 말이다. 조너선 에드워즈(1703∼1758)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부흥설교가 철학자 신학자 사상가였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미국의 제1차대각성운동이다. 학자들은 언제나 그에게 ‘가슴의 신학자’ ‘탁월한 부흥운동 변증가’라는 두 개의 별칭을 붙여주었다.

사후 2세기 반이 지났는 데도 그는 여전히 수많은 영혼들을 사로잡고 있고, 기독교 계통의 단일 인물로는 가장 많은 연구논문이 출간됐다. 무엇이 시공을 넘어 에드워즈를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둔 탁월한 지성과 실천적 영성 때문이다. 지성과 영성이 그의 삶 전체를 지배했고 주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더 나아가 미국의 문화와 정치 사회 그리고 종교사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준비된 지도자

조너선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11명 중 5번째로 출생했다. 그는 11명 중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그의 부친 티모시 에드워즈(1668∼1759)는 윈저에 교회를 개척해 죽을 때까지 64년을 목회했다. 아들의 명성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에드워즈의 어머니 에스더 스토다드는 명문가 솔로몬 스토다드의 딸이다.

필자가 방문한 윈저에는 에드워즈의 부친이 시무하던 교회와 무덤, 에드워즈의 출생지, 그리고 부친의 11대 외손인 로버트 스타 3세가 살고 있었다. 그의 집 거실에는 에드워즈가 사용하던 의자가 남아있다. 윈저의 에드워즈 출생지에는 이런 표시가 있다.

“그는 미국의 첫 신학자요 철학자로 1703년 티모시 에드워즈의 아들로 출생했다. 17세에 예일대를 졸업하고 목사, 예일대 강사, 스톡브리지 선교사, 그리고 1758년 프린스턴대 학장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외손자 아론 버(Aaron Burr)는 미국의 3대 부통령이 되었다.”

에드워즈가 1716년 13세에 예일대에 입학할 때 그는 이미 헬라어와 히브리어, 라틴어를 마스터했다. 17세에 수석으로 예일대를 졸업한 그는 석사를 마친 후 잠시 모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1727년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트가 시무하는 노스햄프턴교회 부목사가 됐다. 단순히 심방목사가 아니라 하루 13시간을 말씀과 신학 연구에 보내는 학자적 목회였다. 스토다드 별세 후 에드워즈는 담임목사가 됐다. 노스햄프턴 시내 중심가에 들어서면 우뚝 세워진 교회가 바로 그가 시무했던 교회였다. 그곳에는 에드워즈가 사용하던 의자가 아직도 남아 있고, 교회 벽에는 그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

에드워즈는 종종 하나님을 대면하는 특별한 영적 체험을 했다. 1737년 어느 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되신 성자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러우신 겸손을 보았다. 그 경험은 한 시간 동안 계속됐다. 에드워즈는 홍수 같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 높여 울었다. 그는 이 날의 경험에 대해 “그리스도의 인격은 모든 사상과 지각을 삼켜버릴 만큼 대단했다”고 기록했다. 에드워즈는 몇 차례 동일한 체험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충만했고, 거룩하며 순수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했으며, 천상의 순수함으로 순결해졌다고 고백했다. 에드워즈는 성령 하나님과 교통하는 체험도 했다. 이런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영광을 이해하는 지각을 갖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영적 체험을 더 한층 깊게 만들어 준 것이 제1차대각성운동이었다. 1734∼1736년과 1740∼1742년 노스햄프턴교회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영원에 대해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온 마을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했고,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거듭난 것으로 인해 기뻐했고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거듭난 것으로 기뻐했다. 많은 부흥운동 지도자들 중 단연 주역은 에드워즈였다. 뉴잉글랜드에서 그와 필적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에드워즈가 코네티컷 주 엔필드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지만 보수적 회중교회 목회자들은 부흥을 반대했다. 그러자 에드워즈는 부흥을 변호하는 변증서를 차례로 저술했다. 그는 ‘성령 사역의 두드러진 특징들’(1741)을 통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사탄의 왕국에 맞서며,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진리와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 영은 확실히 성령이라고 변증했다. ‘뉴잉글랜드 부흥론’(1742)과 ‘신앙감정론’(1742)에서는 참된 부흥이 인간의 감성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며 도덕적 증진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변호했다.

에드워즈만큼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간절히 기도한 사람도 없다. ‘비상한 기도를 촉진하는 겸손한 시도’(1747)에서 그는 성령이 모든 축복 가운데 최고의 축복으로써 “모든 신령한 축복의 총화이며 참되고 영원한 행복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러운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열심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도 했다. 그의 변증서는 당시 부흥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저술들이다. 놀랍게도 노스햄프턴의 포브스도서관에는 에드워즈가 시무했던 당시 교회 기록과 작품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대가 지불하며 목회적 소신 지킨 사람

에드워즈는 목회적 소신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오랫동안 관행으로 여겨온 느슨한 ‘중도언약(half-way covenant)’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성도들을 성찬에 금지시켰다. 그러자 강력한 반대가 이어졌고 남자 성도 230명 가운데 207명이 그의 시무를 반대하는 바람에 1750년 24년을 섬긴 교회를 떠나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 에드워즈와 가족들이 거주할 사택마저 빼앗았다. 에드워즈는 고별 설교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목사인 자신과 교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올 것을 환기시켰다. 이로써 청교도의 엄격한 ‘뉴잉글랜드 방식’은 끝이 났고 개방적 시대가 도래했다.

에드워즈는 1751년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로 자리를 옮겨 목회하면서 존 서진트의 인디언 선교사역을 물려받았다. ‘의지의 자유’(1754) ‘참된 덕성의 본질’(1755) ‘원죄’(1758) 등 훌륭한 작품들이 이 기간에 출간됐다. 1758년 2월 16일 뉴저지대(프린스턴대 전신) 학장에 취임한 에드워즈는 천연두 백신실험에 자원했다가 감염돼 그해 3월 22일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발전시키려고 한 ‘신구약의 조화’와 ‘구속사역의 역사’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사후 그의 영향력은 시공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됐다.

글·사진=박용규 교수(총신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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