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신창호] 용서 기사의 사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결국 자복하는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에 찌들어 학비조차 없는 페테르부르크법대생 라스콜니코프는 수전노 전당포 주인을 살해한다. 돈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저 노인은 타인의 고혈로 배를 채우는 벌레 같은 존재’라는 윤리적 확신에 따른 범행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벌 받기를 간구한다. 수사가 미궁에 빠져 완전범죄로 둔갑되는데도 경찰서에 자수한 뒤 비로소 신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라스콜니코프에게 벌은 구원인 셈이다. 죄 지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받기 위한 단 하나의 출구였다.

예로부터 선인들은 인간에게 용서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용서란 하나님의 빛”이라 했다. 가장 완벽한 존재인 신만이 행할 수 있는 덕목을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실행한다면 그건 신의 경지란 뜻이다. 용서는 죄를 지은 사람과 그 죄로부터 피해를 당한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훨씬 더 중요한 용서는 죄를 저지른 자가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이다. 용서받으려는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전제조건도 있다. 바로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그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이들의 아픔에 머리 숙이는 일이다. 피해자 앞에 진심으로 죄를 자백하는 일이다.

헌법재판소에 제기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유는 최순실씨에게 국가기밀을 누설하고, 대기업을 채근해 최씨 일가에 이권을 몰아준 권력남용 및 금품출연 강요, 뇌물수수 혐의 등이다. 하나하나가 검찰 수사에 의해 뒷받침돼 있고, 특검은 더 많은 사실을 추가할 태세다. 새로운 증거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검찰수사 결과가 하나하나 흘러나올 때마다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민의를 위임했더니 위임받은 자에 불과한 대통령이 이를 엉뚱한 데 다 써버렸다는 분노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수십만 수백만 국민들이 주말마다 전국 대도시 곳곳의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민주주의 권력이란 오로지 공익을 위해 사용돼야만 하고, 어떤 종류의 사익에도 사사롭게 쓰여선 안 되며, 만약 그렇게 사용됐다면 범죄라고 경고하기 위해서다. 이런 준엄한 경고를 받고도 박 대통령은 여전히 “나는 그런 대접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고 있다. 지난 1일 청와대에서 열렸던 출입기자 간담회는 그의 완강한 모습이 낱낱이 확인된 자리였다.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완전히 다 엮어서….” 1시간도 넘게 진행된 간담회에서 행한 박 대통령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한 문장이다. 각종 주요 청와대 문건을 일개 ‘강남아줌마’한테 건네준 일에 대해선 “그저 지인이 아주 조금 자문해줬을 뿐”이라 했고, 최씨 돕기용 재단을 만들어 대기업 금품출연을 강요한 일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한 일이지 다른 목적은 없었다”고 강변했다. 검찰 수사결과를 다 부정하는 말이자, 두 달 넘게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웠던 국민들의 함성마저 업신여기는 말이기도 하다.

국민들은 촛불집회에서 한심한 대통령에 대해 분개했지만, 화풀이를 하진 않았다. 무질서도 폭력사태도 없었다. “박근혜 탄핵”을 외치면서도 서로 웃었고, 합창할 수 있었다. 대통령이 탄핵되더라도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다시 국정을 정상궤도로 올려놓을 만큼 건강하다는 자신감이자 희망 때문이었다. “물러나라”는 외침은 아마도 “합당한 벌을 받고 죄 지은 자신을 용서하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이제 남은 일은 박 대통령의 선택이다. 누가 봐도 잘못된 일을 “잘못한 게 없다”고 계속 견강부회할 것인지, 해선 안 될 일을 했다 참회할 것인지 두 갈래뿐이다. 전자를 택한다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잘못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신창호 종교기획부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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