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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언어, 미술관을 울리다

아트선재센터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 展, 아르코미술관 ‘동백꽃 밀푀유’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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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혜중공업의 출품작 가운데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전시 전경.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장영혜중공업의 국내 개인전은 2010년 이후 7년 만이다. 아트선재센터 제공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을 끼고 정독도서관으로 가는 길.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원색의 큼지막한 글씨가 확 들어온다.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웬 시위 구호인가 싶겠지만 실은 미술관 외벽에 배너 형태로 내건 미술작품이다. 사립미술관인 아트선재센터에서 새해 첫 전시로 마련한 장영혜중공업(한국인 장영혜와 중국계 미국인 막 보쥬 부부 작가 그룹)의 개인전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의 일부인 것이다. 미술관 정면 외벽에는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정치인들─무엇을 감추나’라는 글씨 배너가 걸렸다. 이것도 작품이다.

연초 미술관에 광장의 언어가 메아리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에서는 탄핵 정국을 예견한 듯한 이런 작품들을 선보이는가 하면, 대학로의 공공미술관 아르코미술관에서는 5·18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상작품도 나왔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를 여는 장영혜중공업은 미디어아티스트이다. 외벽에 걸린 작품들은 같은 제목의 비디오 설치작품으로도 출시됐는데, 이게 메인 작품이다. 텍스트(문장)만으로 꽉 채운 화면이 빠른 속도로 바뀌어가는 일종의 애니메이션이다.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 흰 바탕에 검은 글씨, 혹은 검은 바탕에 노랑 빨강의 원색의 글씨가 강렬한데, 그것이 밤거리 카바레 간판만큼 빠른 속도로 명멸하니, 더욱 강렬하다. 여기에 직접 제작한 음악까지 합쳐져 관람객들을 매료시킨다. 랩을 말이 아닌 미술로 하는 듯한 느낌이다. 한번 본 사람은 잊지 못할 만큼 잔상이 강렬한 것은 무엇보다 그 도발적인 내용 탓이다.

출품된 3개의 비디오 설치작업 가운데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를 보자. 요람에서 무덤까지 삼성이 생산하는 제품, 삼성이 제공하는 서비스로 살아가는 우리 삶을 반추하게 하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축하해요!/ 삼성병원에서/태어났군요’에서 시작해 삼성 호텔에서 첫돌을 보내고, 삼성 야구팀을 응원하고, 삼성에 취직하고 삼성호텔에서 결혼식을 하는…. 장영혜중공업은 1999년 비디오 작품 ‘삼성의 뜻은 쾌락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를 선보이며 삼성 시리즈를 시작했다.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정치인들─무엇을 감추나’는 정치인의 기만적 태도를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행위에 비유한 비디오 설치작품이다.

또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는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가족 싸움을 소재로 했다. 문장마다 풍자와 해학이 넘쳐나는 등 문학성도 있다. 3개의 비디오 설치 작품은 모두 한국어 버전, 영어 버전으로 제작해 2개의 대형 화면에 동시에 틀어주고 있다. 넒은 전시공간에 대형 화면 2개가 전부이지만, 워낙 센 작품이라 썰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는 3월 12일까지(02-739-7098).

아르코미술관의 ‘동백꽃 밀푀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국제교류사업으로 진행한 한국-대만 큐레이터 교류프로그램의 성과다. 독립큐레이터 김현주·조주리(한국), 왕영린(대만)이 각각 자국의 작가 5명씩을 초대한 협력기획전이다. 동백꽃은 서구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표상의 하나인 ‘동백꽃’과 나폴레옹 제국의 번성과 함께 전파된 프랑스 디저트 ‘밀푀유’를 결합시킨 조어이다. 양국의 핏빛 근현대사를 다룬다.

나현 작가는 1980년 5·18광주항쟁과 같은 날 미국 시애틀에서 있었던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 사건을 병치시키는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원자폭탄 구름 같은 검은 구름과 용암이 흘러내리며 산을 순식간에 잠식하는 무시무시한 화면은 전혀 상관없는 사건인데도 ‘광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교묘하게 개입한다. 대만작가 천졔런의 ‘잔향의 영역’은 일제 식민지 시기 대만 타이페이 도심에 세운 한센병 환자 요양원인 낙생원의 강제이전과 보존 운동의 역사를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집단 기억·공적인 서사를 다룬 작품들과 함께 노동과 경제식민화, 압축성장·개발과 배제가 전시의 세 가지 키워드이다. 2월 12일까지(02-760-4608).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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