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한민수] 구세주 콘셉트 기사의 사진
여의도 정가에는 이른바 ‘구세주 콘셉트’라는 게 있다. 기독교에서 구세주는 죄악과 죽음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이지만, 정치권에서는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이는 진영이나 정당, 정파를 구해주기 위해 깜짝 등장하는 지도자를 의미한다. 구세주처럼 나타나 패색 짙었던 선거를 한방에 뒤집어버려 붙여졌다. 이를 선거 전략으로 삼은 것이 구세주 콘셉트다.

여야가 이 콘셉트로 맞대결을 펼친, 흔치 않은 일이 있었다. 2006년 5월 서울시장 선거에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인기가 많이 떨어진 탓에 열린우리당은 마땅한 서울시장감을 찾지 못했다. 반면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한나라당에선 홍준표, 맹형규 의원 등이 서로 출마하겠다고 경쟁을 벌였다. 그때 여당이 어렵게 모셔온 구세주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출마선언을 하자마자 한나라당 후보군과의 가상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야당이 이번엔 구세주를 구해 왔다. 정수기 TV광고와 선거법 개정을 주도하며 클린 이미지를 쌓은 오세훈 전 의원이었다. 당시 여권 인사는 “한나라당보다 늦게 강금실을 내세웠다면 선거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같은 콘셉트라도 나중에 등장하는 구세주가 유권자에게 더 먹힌다는 것이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지지도가 형편없었던 이명박 대통령을 대신할 보수진영의 구세주였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전 혜성처럼 등장한 안철수 의원은 새 정치를 구현할 구세주 콘셉트로 다가왔다.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이 일거에 지지율 50%를 몰아주며 열광한 이유다.

이런 구세주 콘셉트를 들고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오후 귀국했다. 그는 근래 들어 이 콘셉트가 가장 잘 맞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의 상위권을 차지하는 후보 가운데 반 전 총장을 제외하면 모두가 야권 소속이다. 보수와 중도보수 진영으로서는 기댈 언덕이 현재로선 그밖에 없는 셈이다.

그런데 구세주 콘셉트가 성공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우선 강금실의 경우처럼 자신보다 늦게 출현하는 구세주가 없어야 한다. 일단 야권에서는 후보들의 윤곽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안도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요즘 원조보수그룹에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등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삐끗하면 그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콘셉트를 선거 당일까지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처럼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는 국민도 많지 않다. 열광적 지지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국내에 없었던 그의 구세주 콘셉트는 ‘신비주의’와 맞물려 있다. 뉴욕에서 포장돼 전해지는 소식과 매일 TV와 신문으로 접하는 일거수일투족은 다르다. 물론 긍정과 부정 효과 중 어느 쪽이 클지는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아울러 검증을 무사히 통과하거나, 적어도 상처를 덜 입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기대선이 실시된다 해도 반 전 총장은 짧게 4개월, 길게는 8개월간 검증대에 서야 한다. 솔직히 그는 지금까지 이전투구의 한국 정치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흠집이 나지 않은 측면이 크다.

끝으로 구세주 콘셉트로 등장한 인물치고 성공한 전례가 별로 없다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다. 그간 ‘구세주 콘셉트=허상(虛像)’으로 끝난 일이 적지 않았다. 굳이 누구라고 언급하지 않더라도 국민은 다 안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반 전 총장이 과연 이 콘셉트를 유지해 집권을 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이번 대선전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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