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장지영] 박정희와 윤이상의 100주년 기사의 사진
박정희와 윤이상은 둘 다 1917년생이다. 올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됐다. 정치가와 음악가인 두 사람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대척점에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교사 출신 지식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은 초반의 선택부터 확연히 달랐다. 박정희는 천황에 충성 혈서를 써가며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일본군 장교가 된 뒤 중국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다. 반면 일본 유학 중 태평양전쟁 조짐이 보이자 귀국한 윤이상은 징용돼 미곡창고에서 일했다. 당시 항일 지하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당하고 3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석방 후 다시 저항활동을 꾀하다 결핵으로 쓰러진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박정희는 중국 베이징에 있던 광복군에 들어갔다. 당시 광복군이 대한민국 정부의 국군이 되기 위해 확대 개편을 추진하던 터라 검증 없이 사람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국군 장교가 된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여수·순천사건 연루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로당 조직원들의 이름을 대 형집행정지가 됐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복귀했다. 광복 후 윤이상은 고향인 통영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4년 동안 통영 인근 학교들의 교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20곡이 넘는다. 부산에서 한국전쟁을 맞은 윤이상은 고아원을 열어 전쟁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에서 승승장구한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주의를 위해 이승만정부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혁명의 성과를 무너뜨린 것이다. 반면 윤이상은 프랑스 파리에서 4·19혁명 소식을 접한 뒤 젊은이들의 죽음에 목 놓아 울었다.

이후 박정희가 한국에서 독재 기반을 구축하는 동안 윤이상은 유럽에서 당대 최고의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두 사람은 1964년 처음 만났다. 박정희가 외화를 벌기 위해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던 서독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서독 정부는 공식 행사에서 윤이상의 곡을 연주했다. 또 서독 한인회 회장이던 윤이상은 교포들을 대표해 환영행사를 주관했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냉랭했다고 한다.

3년 뒤 대통령 선거에 대한 부정시비가 끊이지 않자 박정희정권은 대규모 공안사건을 일으켰다. 바로 유럽에 거주하던 학자와 예술가들을 납치해 반공법으로 투옥한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다. 윤이상은 고문 끝에 자살을 기도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서독 정부와 세계 음악계가 박정희정권에 압력을 가한 덕분에 풀려났다. 독일로 추방된 윤이상은 귀화를 택했지만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벌이는 등 줄곧 박정희정권에 맞섰다.

박정희는 1979년 부하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했다. 하지만 윤이상은 박정희 사후에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다시 군부독재가 이어지고 보수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에 1995년 윤이상이 세상을 뜰 때까지 귀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윤이상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땐 다시 이데올로기 논리로 윤이상 관련 사업 지원을 중단하거나 줄였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박정희 기념사업은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축소됐다고는 하지만 수백억원에 달한다. 이에 비해 윤이상 기념사업은 통영시가 10억원을 지원하는 통영국제음악제 등 손꼽을 정도다.

장지영 문화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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