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분노한 촛불들 직접민주주의 불을 댕기다 기사의 사진
“어떤 결정이든 잘못됐다 싶을 때가 있잖아요. 계속 가야 할지, 멈춰서야 할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듯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어요. 근데 선거는 그게 사실상 불가능한 것 같아요. 우리를 대변해 달라고 뽑았는데 배신당했다고 느껴도 내가 던진 한 표를 무를 방법이 없으니까요. 좌절하고 자책할 수밖에 없는 게 아쉬워요.”

서울 광화문광장이 170만 촛불로 가득 찼던 지난해 12월 3일.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로 향하는 행렬에서 만난 직장인 이모(37)씨는 “그래서 광장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던 선택을 후회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촛불을 드는 것뿐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로부터 6일 후 국회에서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습니다. 이씨를 비롯한 촛불시민들은 ‘응답’을 받았지만 탄핵 당일까지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들이 아니라 ‘대리인’인 국회의원들 손에 모든 걸 맡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싶다는 시민들의 욕구는 이번 촛불정국을 계기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민의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들 역시 이를 반영한 ‘국민투표’ 관련 입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를 넘어 직접민주주의를 보다 확대하는 ‘포스트 87년 체제’ 마련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개헌과 대통령 결선투표제, 국민소환제·국민발안제 등 다양한 방식의 국민투표 논의가 여의도 정치권에서 흘러나옵니다. 입법 성과로 이어진다면 경우에 따라 향후 1∼2년간 10여 차례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우선 탄핵 및 조기 대선 국면과 맞물려 가장 뜨거운 이슈는 개헌입니다. 개헌은 현행 법체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국민투표 사안입니다. 또한 차기 정치체제 출범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과 세력 간 합종연횡을 불러일으킬 촉매로도 작용할 전망입니다. 우리 정치 지형이 21세기 들어 최초로 4당 체제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국회는 개헌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개헌안 마련에 돌입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선 전 개헌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관측이 우세합니다. 유력하게 떠오르는 대안은 ‘내년 6월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주장입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출간한 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이 같은 구상을 공개했습니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공동대표 역시 지난달 동일한 방식의 개헌 투표가 적합하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야권 대선 주자들이 개헌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적절한 방식과 시기에 대한 논의가 대선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질 전망입니다.

대선 결선투표제 도입 역시 치열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결선투표는 사표를 줄여 대표성을 높인다는 관점에서 직접민주주의 확대로 해석됩니다. 아직은 결선투표가 개헌 사안이냐, 선거법 개정 사안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국민투표 중 가장 먼저 추가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코리아리서치 신년 여론조사 결과 결선투표제 도입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51.3%에 달했습니다.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 국민의당·정의당 등 소수 정당과 학계에서는 개헌이 아닌 법 개정을 통한 결선투표제 도입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선거기간을 연장하는 내용을 담은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안’이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국민의당 채이배 의원 등의 대표발의로 소관 상임위인 안전행정위원회에서 심사되고 있습니다.

국민투표 대상 자체를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핵심은 미래세대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선거연령 하향 조정’입니다. 19세 이상에게 부여하는 선거권을 18세 이상으로 하향하자는 개정안은 국민의당 김관영, 정의당 윤소하 의원 등의 대표발의로 소관 안행위 소위에서 논의 중입니다. 하지만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이 반대해 안행위 전체회의 통과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이밖에 재외국민에게도 국민투표권을 주자는 개정안이 새누리당 김도읍 의원 발의로 심사 중입니다. 특히 재외국민 선거의 경우 즉각적인 법 개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탄핵이 인용되면 60일 이내 대선이 치러져야 하는데 현행 선거법상 재외선거도 60일 전까지 선거인 등록을 마치게 돼 있어서입니다.

국민소환제 도입도 탄핵 및 촛불정국과 맞물려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을 위한 대표적 보완책으로 꾸준히 모색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헌법에 규정된 의무를 위반하거나 위법·부당한 행위를 하는 경우 국민 손으로 책임을 묻는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습니다. 덧붙여 국민이 스스로 필요 법안을 발안하는 국민발안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함께 논의되고 있습니다.

민주당 김병욱 의원은 탄핵정국 중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습니다. 국민 청원에 의해 선출직 공직자의 임기를 조기 종료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절차는 해당 지역 주민들이 유권자 15% 이상의 서명으로 해당 의원에 대한 국민소환 투표를 청구하게 됩니다. 이후 유권자 3분의 1 이상이 참여해 유효투표 총수 과반이 찬성할 경우 바로 의원직을 상실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민의당도 국민투표제·국민발안제 등을 정치혁신 과제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정동영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대개혁위원회’를 발족해 국민소환제·국민발안제·국민투표 확대 등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개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화하는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내 손으로 국회의원을 ‘리콜’하고, 국민이 법안을 직접 제안하는 일이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는 다수의 무관심에 기초하고 있다.’ 퓰리처상을 두 차례나 받은 뉴욕타임스의 간판 저널리스트 제임스 레스턴은 적극적 소수가 이끌어가는 대의민주주의의 허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촛불광장에 나온 다수의 국민들은 잃어버린 4년이 자신들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에 대한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입니다. 직접민주주의 확대를 갈망하는 분위기 역시 무르익었다고 생각됩니다. ‘촛불이 명령한다. 국민은 투표로 응답하라.’ 탄핵 가결 기사에 한 네티즌이 남긴 댓글입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국민투표 시대 도래를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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