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이지현] 일상에서 잃어버린 것들 기사의 사진
“장미 꽃잎의 빗방울과 고양이들의 작은 수염, 밝게 빛나는 금속의 솥과 따뜻한 털 벙어리장갑, 갈색의 종이들과 그것을 매고 있는 노끈들… 코와 눈썹에 떨어진 눈송이들, 봄기운에 녹는 은빛 겨울 풍경, 이것들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 개에 물리고 벌에 쏘이고 맘이 슬플 때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생각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주인공 마리아가 천둥소리에 놀란 아이들에게 불러주던 ‘마이 페이버릿 싱(My Favorite Things)’의 노랫말이다. 마리아가 아이들에게 ‘외롭고 무서울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 내면 슬프지 않다’며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청소년 시절 이 영화를 본 후 행복해지는 단어들을 노트에 써 봤다.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쓰면서 따뜻한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가 어떤 소리나 장면을 떠올릴 때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과거 행복했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함께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일상의 소리를 담은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영상이 청년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북미에서 인기를 끌던 이 영상은 2014년 한국에 상륙해 현재 540만여개가 유통되고 있다. 이 중 한국에서 만든 영상이 전체 35%를 차지할 정도로 관심이 높다. ASMR은 ‘자율감각 쾌락반응’의 약자로 신조어다. 이 영상은 누구나 편안한 감정을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일상 속 순간을 포착해 음성으로 당시의 오감(五感)을 재경험시키는 것이 포인트다.

예를 들면 종이 위에 사각거리는 연필소리, 과자를 먹을 때 바삭하는 소리, 누군가의 속삭이는 목소리, 빗물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 부드럽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 손바닥 비비는 소리, 유리병을 손톱으로 두들기는 소리, 병뚜껑을 돌려 여는 소리 등을 연속해서 들려준다. 많은 사용자들이 이 영상들을 보고 숙면을 취했다는 댓글을 달고 있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성과주의에 매몰돼 살아왔다. 대부분 사람은 일상에서 항상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물론 침대에 누워있을 때도 잠들기 직전까지 스마트폰을 들고 뭔가를 한다. 집에 혼자 있을 땐 습관적으로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해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ASMR의 소리들은 예전엔 집에 머물면서 들을 수 있었던 소리이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들었어야 할 소리이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소리, 하루를 시작하는 할머니의 기도 소리, 잠자기 전 동화를 읽어주시던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다. 그러나 이런 소리를 들을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학교에서 학원으로 돌다 늦은 저녁에야 귀가해 밀린 숙제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어른들도 성과 위주의 사회환경 속에서 내면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수면장애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최근 5년 사이 57%나 증가했고 이 중 20, 30대의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한다. 취업이나 공시(公試), 결혼을 앞두고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과 우울로 수면장애를 겪고 있는 젊은 층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ASMR 영상 사용자가 증가하는 것은 그만큼 ‘일상의 회복’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ASMR이 정신적 여유가 없는 젊은 층의 손쉬운 불면증 해소법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처방이 되기는 어렵다. 우린 어느새 고독으로 지어진 집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철문을 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에 귀를 닫은 것은 아닌지 ‘마음의 정원’을 돌봐야 한다. 자신과 마주하는 고독한 시간을 통해 내면의 갈망과 마주해야 한다.

이지현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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