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유영만] 思想은 聯想이다 기사의 사진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인문계 과목을 공부하는 시간보다 용접을 했던 시간이 많았다. 대학 진학이 목적이 아니라 취업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입 시험 준비를 하면서 학업성취도를 올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실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실패는 용접기능사 시험에서 낙방했던 아픈 체험이다. 용접의 핵심은 용접봉을 녹여 뜨거운 철물로 이질적 철판을 접합시키는 데 있다. 순간적으로 온도 조절을 잘못해서 철판에 구멍이 뚫어졌다. 더 이상 정성을 들여 용접해도 합격은 물 건너간 터였다. 이미 불합격이 예고된 상황에서 나는 용접봉을 녹여 철판에 구멍을 크게 뚫어버렸다. 그 후 철판만 생각하면 보름달이 연상된다. 한겨울에 철판을 맨손으로 접촉하며 내 몸에 각인된 차가움은 추상적 기억이 아니라 생생하고 구체적인 추억이다. 철판에 용접봉으로 구멍을 뚫을 수밖에 없었던 실패 덕에 전혀 관계없는 보름달과 철판을 연결시켜 상상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을 얻은 셈이다. 사람의 생각은 그와 함께 연상되는 연상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 고(故) 신영복 교수님의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에 나오는 구절이다.

철판과 용접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한때 하루 일과의 많은 부분을 함께했던 일상적 사물이자 사연을 품고 있는 일과였다. 하지만 철판을 용접으로 녹여 붙여본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 철판과 용접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관념적 단어나 개념에 불과하다. 아파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사람은 가수 윤수일의 노래 제목을 연상한다. 아파트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몇 평인지가 관심의 대상이고 강남, 강북, 강변이나 역세권 등 위치가 중요한 정보일 것이다. 나에게 아파트는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는 노동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대학 시절 여름방학 동안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벽돌을 짊어지고 날라본 체험이 떠올라서다.

“기억의 폭이 좁을수록 미래를 폭넓고 독창적으로 구상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기억을 먹여 살리는 방법은 몸을 먹여 살리는 방법만큼 중요하다.”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뭔가를 암기하는 능력보다 살면서 몸에 각인된 각양각색의 체험적 얼룩과 무늬다.

어렸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판에서 뛰어놀았던 기억, 회색빛 청춘을 보내면서 무수한 방황과 시행착오 끝에 찾은 한 줄기 희망, 우연히 집어든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던 계기, 학창시절 나의 단점보다 강점을 칭찬해주며 꿈과 용기를 심어준 스승과의 운명적 만남. 이 모든 것이 내 몸의 기억창고에 저장된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책에서 배울 수 없는 다양한 도전을 통한 성취 체험과 생각지도 못한 실패와 좌절 체험 역시 내 삶의 얼룩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무늬로 재생되는 기억들이다. 생각만 해도 지난 시절의 기억이 구체적 모습으로 떠오르는 건 많은 사람이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증거다. 기억 창고에 저장된 체험의 흔적이 넓고 깊은 사람은 그만큼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도 연결시켜 상상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쓰러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이 말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곡’에 나온다. 시간의 점이란 내가 살아오면서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 체험의 총량이다. 시인 워즈워스도 어린 시절 알프스를 여행하며 만났던 장면이 너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시를 쓸 때마다 당시의 장면이 떠오른다고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과의 사연,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온 산전수전의 체험, 그리고 그런 체험적 고뇌가 녹아 있는 책을 읽으며 내 몸에 생긴 시간의 점이 선을 만들고 그 선이 다시 면을 만든다. 여기서 면은 바로 한 사람의 면모(面貌)다. 그 사람의 면모는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점과 점이 연결되어 만든 선의 합작품이다. 한 사람의 사상의 깊이와 넓이도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직간접 체험의 깊이와 넓이, 체험과 관련된 다양한 기억의 밀도 및 강도와 직결된다. 지금 국가적 위기로 겪는 힘든 체험도 먼 훗날 소중한 인생 교훈으로 작용하는 아름다운 ‘시간의 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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