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이동훈] 탄핵이 기각된다면? 기사의 사진
마약보다 끊기 어려운 게 담배라고 한다. 대학 1학년 때 술자리에서 친구들을 따라 피우기 시작한 담배. 이 지긋지긋한 담배를 지난해 4월 끊는 데 30년이나 걸렸다. 7일로 310일밖에 안 됐으니 끊었다기보다는 아직은 참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끊으려 하면 할수록 그 맛을 못 잊는 것이 담배가 무서운 이유다. 전자담배도 사 봤지만 길들여진 담배의 맛을 잊지 못해 오히려 흡연량만 늘어나기도 했다. 오죽하면 가끔 꿈에 나타나 한 대 피우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해 괴로워한 적도 있을 정도다. 모바일 금연앱 회원들 사이에서는 ‘담배 한 개비’는 피워도 괜찮다고 유혹하는 귀신을 ‘한귀’라 부른다. 한귀에 넘어가면 다시 흡연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다.

며칠 전 만난 친구들은 “네가 끊을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한다. 마음가짐을 달리했더니 신기하게도 담배를 멀리할 수 있게 됐다. 담배와 나는 더 이상 상관이 없다거나 지구상에 담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멀리 떠나간 첫사랑의 추억으로만 여기자고 다짐하니 금연패치마저 일주일 만에 떼어낼 수 있었다.

우리사회에는 흡연만큼 끊기 어려운, 달콤하면서도 우리를 헤어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내모는 버릇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이번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불거진 부패와 유착이라는 중독증이다. ‘누이 좋고 매부만 좋은’ 이 중독증은 뇌물(X)과 특혜(Y) 사이의 1차방정식으로 이뤄진다.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남을 앞지르기 위해, 공정한 경쟁을 피해 테이블 밑으로 돈과 특혜가 오가는 우회로가 그리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 정권 이래 수십 년 동안 심화된 적폐를 1998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끊은 듯 보였지만 ‘한귀’의 유혹에 넘어갔다. 요즘 표현으로 ‘달달한’ 맛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억 원짜리 경주용 말 몇 마리와 명품가방이 서민들에게는 ‘넘사벽’일지 모르지만 수천억 원짜리 이권만 돌아온다면 그야말로 ‘껌값’에 불과하다.

5일로 100일이 지난 광화문광장 촛불시위는 우리 국민에게 이런 악폐들을 걷어내고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희망을 선사했다.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여러 대선주자들이 과거와의 청산을 외치고 있어 더욱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다수의 국민은 얼마 안 있으면 결정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을 당연한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 마지막 탄핵심판을 주재하는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을 3월 13일 이전에 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로 묘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대통령 대리인단의 일괄사퇴 협박에 이어 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보수논객 인터뷰까지 이어졌다. 요 며칠 사이에는 유명 대법원장 출신 인사 등의 이름까지 동원되며 탄핵기각 불가피설이 그럴듯한 논리를 앞세워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정말, 만에 하나, 헌재가 대통령 탄핵을 기각한다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예기치 않은 반대 결과로 돌아섰을 때 그 후폭풍이 어땠는지는 역사가 보여준다. 1987년 6·10시민항쟁의 성과가 기만적인 ‘6·29선언’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군사정부의 정권 연장에 이어 ‘3당 야합’과 대대적인 야권 탄압이 자행됐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박 대통령 측은 탄핵을 막으려 사활을 걸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달달함에 중독된 기득권 세력이 포진하고 있음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아이들 세대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썩은 부위를 도려내야 할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이동훈 사회부장 dhle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