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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고승욱] ‘날 것’ 보도하는 언론

국민은 정치인 맨 얼굴 볼 권리 있어… 그것을 충족시키는 게 언론의 의무

[내일을 열며-고승욱] ‘날 것’ 보도하는 언론 기사의 사진
인터넷 세상이 막 열렸던 2000년대 초반 국민일보는 기존 보도 관행을 뛰어넘는 새로운 뉴스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어느 언론사도 시도하지 않았던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국회와 정부기관, 기업의 보도자료를 가공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자”는 젊은 기자의 제안이 국민일보 인터넷뉴스(KUKI·KUKminilbo Internet news)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과 기술혁신, 단순 검색서비스에서 포털사이트로 발전한 기업혁신이 결합하면서 ‘날것’을 담은 기사는 무시할 수 없는 언론의 중요한 기능이 됐다.

있는 사실 모두를 가공하지 않고 전하는 기사가 나온 지 1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익히지 않은 음식에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정치인은 대부분 그렇다. 미리 준비한 행사장에서 사진을 찍고 다른 곳으로 급히 이동하는 정치인에게 이런 보도행태는 재앙이다. 20세기 독자는 표정이 좋고 앵글이 탁월한 사진만 볼 수 있었다. 어색하게 웃거나 화내는 사진은 신문사에서 몇 단계 데스크를 거치며 추려졌다. 시나리오에 없는 행사장 뒤편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기자만 알고 끝났다. 하지만 21세기는 완전히 다르다.

TV 뉴스에 나오지 않은 동영상이 유튜브에 오른다. 주변에서 벌어진 시시콜콜한 일은 반드시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다. 이런 일을 보도하지 않는 기자는 ‘기레기’(쓰레기 기자)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과거 뉴스 소비자였던 국민은 SNS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뉴스를 평가한다. 심지어 뉴스 생산자로 직접 나서 답답함을 해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날것에 익숙하지 않아 소화불량에 걸린 대표적인 정치인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다. 반 전 총장은 귀국한 날부터 과거와 달라진 언론과 맞서야 했다. 인천공항을 나서자마자 지하철 표를 사느라 진땀을 흘렸고 에비앙 생수가 시선을 끌었다. 턱받이와 퇴주잔 때문에 국민에게 제대로 된 메시지를 전할 기회를 놓쳤다. 반 전 총장은 혹독한 공세가 무척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17년의 대한민국 정치인은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로 호소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뜻을 접었다.

정치인의 사진찍기 이벤트는 야당 지도자도 예외는 아니다. 전통시장에서 국밥을 먹는 사진을 찍지 않은 정치인은 없다. 포털사이트에서 이미지 검색을 하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국밥을 먹는 사진이 수도 없이 나온다.

대통령은 어떤가. 종합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은 국회 탄핵소추안 발의를 전후해서야 박근혜 대통령 기자회견을 가감 없이 보도했다. 전에는 청와대에 미리 알려준 질문을 약속한 순서대로 물어본 뒤 대통령 발언을 논리에 맞게 정리해 기사로 만들었다. 거부하기 힘든 관행이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일 불이 난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했을 때 쏟아진 기사는 과거 대통령 동정 기사와 전혀 달랐다. 앞으로는 누가 대통령이 돼도 터진 봇물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은 정치인의 맨 얼굴을 볼 권리가 있다. 많은 사람이 그 권리를 2016년 겨울 광화문에서 깨달았다. 날것을 보도하기 꺼린 언론의 책임이 컸다.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확립한 이미지 정치가 ‘보통사람’으로 한국에 상륙하더니 오랫동안 유권자의 눈을 흐리게 했다. 2017년 대선은 ‘조명발’과 ‘화장발’ 없이 ‘날것’으로 치러야 한다.

고승욱 온라인뉴스부 선임기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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