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한민수] 제대로 져야 살길이 있다 기사의 사진
용을 써도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딱 한국 보수진영의 처지다. 올해 대선에서 별의별 수를 다 내놔도 정권을 다시 잡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야권의 대항마로 꼽혔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낙마한 이후 더 곤궁해졌다. 출마 여부도 확실치 않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급등하고 태극기집회 참석자도 늘었지만 여전히 국민의 78.5%는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인용해야 한다고 밝혔다(동아일보·리서치앤리서치 2월 3∼4일 조사, 탄핵 기각 찬성 13.9%).

지리멸렬한 보수는 10년 전 진보의 판박이다. 노무현 대통령 인기가 바닥을 치자 과반 의석을 가졌던 열린우리당은 대선을 앞두고 사분오열됐다. 대통합을 내걸고 뭉치는 시늉을 했음에도 530만표 차로 대패했다. 이번엔 보수가 유사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은 후보단일화 등을 내걸고 구도를 ‘보수 대 진보’로 짜려고 안간힘을 쓰겠지만 잘될 것 같지는 않다.

우선 2007년의 진보진영처럼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당시 누구를 내보내도 한나라당의 이명박, 박근혜 후보를 꺾을 재간이 없었다. 현재 보수에는 황 대행을 빼면 지지율 5%를 넘는 주자가 단 한 명도 없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문재인 전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중 누가 나가도 이긴다. 둘째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탄핵이 헌재에서 인용되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민주당이 경선에서 국민적 흥행마저 거둔다면 속수무책으로 밀릴 것이다. 헌재가 기각할 경우 여유가 생기지만 새누리당이나 바른정당의 실력으로 보수층을 묶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야당에 맞설 유력 주자도, 시간도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지만 그래도 이 땅의 보수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도저히 패배를 피할 방법이 없다면, 제대로 지는 것이다. 그래야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과거 대선에서 참패를 당한 진보는 이듬해 총선에서 또 크게 지며 그 싹까지 송두리째 뽑혀 나갈 뻔했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재인, 안희정이 가능했겠는가.

결국 보수가 싹을 보존하고 미래를 기대하려면 박 대통령과 친위 세력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은 물러나는 형식을 고민할 때가 됐다. 촛불집회보다 태극기집회 참석자가 두 배 많다고 우겨본들, 4%였던 지지율이 10%로 올라간들, 설사 탄핵이 기각된다고 한들, 대통령직무에 복귀해 정상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다고 보는지 묻고 싶다. 박 대통령은 국민 전체가 아닌 최소한 보수만을 위해서라도 ‘덜 나쁜 퇴장’을 생각해야 한다. 여론전, 시간 끌기, 이런 것 하지 말고 본인 잘못을 인정하고 헌재와 특검의 처분을 기다리거나 자진해서 사퇴하는 방법이 있다. 작은 감동이라도 준다면 보수는 의외로 단기간에 회복 단계로 접어들 수도 있다.

당명을 바꾸기로 한 새누리당과 바른정당도 보수답게 처신하길 바란다. 권한대행을 대선 주자로 만들려고 무리하지 말고 순리를 따라야 한다. 또 공약이 됐든, 정강 정책이 됐든, 어줍지 않은 진보 흉내도 그만 냈으면 좋겠다. 박근혜 없다고 세상 끝난 것처럼 징징대지 말고 자숙하고 있으면 내년엔 지방선거, 2020년에는 국회의원 총선이 있다.

보수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법과 원칙을 지키고 책임과 희생을 진다’는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이 가치를 더 이상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끝을 향해가고 있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박 대통령과 그의 정치 세력이 해야 할 마지막 소명은 바로 이것이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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