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노동의 공유 기사의 사진
표정이 싹 빠진 건조한 얼굴의 그는 기계적으로 과자봉지의 바코드를 찍어댔다. 자정이 넘은 시간, 간식거리를 찾아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과 알바로 마주친 지 꽤 됐다. 얼굴이 익자 몇 마디 던졌다. 그렇게 2주쯤 말을 주고받으면서 신상을 탐문했다. 요약하면, 그는 수도권의 어느 대학 5학년(졸업을 1학기 남기고 계속 미루고 있다고 했다)이다. 나이는 올해로 스물여덟 살. 낮에는 다른 알바를 뛰고, 밤에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한다. 생활비랑 학비를 벌어야 해서란다. 물론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한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취업 준비란 준비는 다 했단다.

‘대기업만 쳐다보지 말고 중견·중소기업에라도 취업을 해야지 않느냐’라는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했다. 수없이 많은 중소기업에 구직을 해봤고, 괜찮은 중소기업의 일자리는 당연히 경쟁도 치열하단다. 대기업 인턴사원 20명을 뽑는데 6000명이 몰려드는 판국이니 말 다했다. 9급 공무원 시험도 온통 ‘스카이’(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합쳐서 쓰는 말) 판이란다. 그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고 했다. “서울에 전셋집 하나 구하려면 10년을 넘게 안 쓰고, 안 먹어야 해요. 앞선 세대와 비교하면 우리 세대는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아요.”

지난달 18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불평등, 불신, 희망의 부재(不在)가 가져올 위기를 경고했다. 경고장은 이미 우리에게도 날아들었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분노는 위험 수위까지 차올랐다. 사라진 희망, 불평등의 실체는 일자리다. 기성세대들은 지금의 ‘일자리 대란’을 방치했다. 곪아 터질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했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엄청난 격차를 외면했다. 제조업에서 더는 일자리 창출을 기대할 수 없는데도 서비스업 활성화는 정치싸움에 희생되면서 뒷전으로 밀렸다. 산업구조 개혁, 교육개혁, 노동개혁 따위는 그냥 구호였을 뿐이다.

구호는 다시 넘쳐난다. 대선을 앞두고 유력주자들은 저마다 일자리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제각각 근로시간 단축, 경제민주화, 교육혁명, 기본소득 도입, 창업지원, 지역경제 혁신 등을 내세운다. 하지만 모두 본질을 비켜 간다. 숱한 외면과 방치, 말잔치를 걷어내면 ‘냉혹한 본질’이 고개를 쳐든다. ‘내가 치열하게 경쟁해서 쟁취한 경제적 이득’을 남과 나눌 수 없다는 생존논리 말이다.

일본은 고통스러웠던 ‘잃어버린 20년’을 지나오면서도 어떻게든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도록 애를 썼다. 최근 일본 기업들은 앞다퉈 주 4일 근무제까지 도입하고 있다. 사회적 공감, 혹은 암묵적 합의 아래 ‘일자리 나누기’ ‘노동의 공유’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반면 올해도 우리 정부의 경제정책은 경기 활성화, 즉 성장률 우선주의에 쏠려 있다. 일자리 창출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지만 ‘노동의 공유’라는 핵심에 가닿지 않았다. 대신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커져야 각자의 몫이 커진다는 ‘파이 이론’은 여전히 힘이 세다. 1조4000억 달러 규모의 GDP를 자랑하는 세계 11위 경제가 과거 고도성장기와 같을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 위기가 더 깊어질 수 있는데 ‘몇 % 성장’에 집착하는 건 너무 안이하다.

얼마 전 야근을 마치고 그 편의점에 들렀다. 건조한 얼굴의 그는 없었다. 비슷한 사연을 가졌을 법한 또 다른 건조한 표정의 야간 알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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