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한승주] 검은 시의 목록 기사의 사진
방음도 보온도 안 되는 곳이었다. 밖에서 부는 칼바람에 검은색 텐트가 펄럭였다.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오롯이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녹여야 하는 곳. 그 텐트 안이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 세워진 블랙텐트. 지난 11일 오후 2시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지원배제명단)에 오른 시인 99명이 낸 시집 ‘검은 시의 목록’ 낭송회가 열렸다.

시인 함민복은 “노래를 못해 악기라도 배워 기타리스트나 비올리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블랙리스트가 됐더라”며 오히려 웃었다. 그러면서 “블랙리스트는 어둠으로 연주하는 사람이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어둠을 연주해 빛의 세상을 열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다 블랙리스트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는 옛 소련의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해 ‘작가는 제2의 정부’라고 말했다. 위대한 작가는 정부가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블랙리스트에 오른 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는 자격증을 받은 것 같아 영광스럽다고도 했다.

낭송회에 나온 한 시인은 자신은 나이도 어리고 작은 출판사에서 월급 180만원 받으며 열심히 글을 쓴 것밖에 없는데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시인이 광장에 나오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라고 말했다.

애초에 시인은 가난하고 춥고 쓸쓸하고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이다. 모두 곤히 잠든 밤에 홀로 깨어서 시대를 고민하는 존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할 말을 하는 사람. 시인은 그래왔다. 시인뿐 아니라 예술인 대개가 그렇다. 세월호 참사에 이들이 앞장서 슬퍼하고 분노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박근혜정부에는 이런 일이 무척 거슬렸다. 이 정부 출범 후 문화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영화 ‘관상’은 2013년 런던한국영화제에 초청됐으나 개막 며칠 전 상영 목록에서 빠졌다. 주연 배우 송강호가 영화 ‘변호인’에 출연해서, 이 영화가 아름다운재단과 관련 있어서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월호 사건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배급했던 시네마달. 그 이후 한 건도 투자받지 못해 회사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놓였다. 이 영화를 상영했던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듬해 예산이 45% 삭감됐다. 박정희 박근혜 부녀를 풍자하는 대사가 나왔던 연극 ‘개구리’를 연출한 박근형씨. 그의 작품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국비 1억원 지원이 결정됐으나 발표가 두 달 넘게 미뤄지다 결국 자진포기라는 수순을 밟았다. 누군가는 강연이 취소됐고, 어떤 작품은 공공극장 대관이 불허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문화를 언급하고, 주요 국정기조로 문화융성을 꼽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주요 과제는 문화융성이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오른 개인과 단체에 얼마나 지원을 배제하느냐가 됐다. 국가정보원이 사상검증을 해 청와대가 작성한 리스트가 문체부로 내려오면, 공무원들은 양심을 접어두고 이를 실행했다.

국가가 자본의 힘으로 문화예술인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 특정 이념적 성향을 가진 사람을 배제시키겠다는 생각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 블랙리스트는 우리 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뿐 아니라 관객들이 다양한 작품을 누릴 자유도 빼앗는다. 더구나 이들이 세월호의 아픔에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면, 우리 국민 누가 이 명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는 문화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문제다.

한승주 문화부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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