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한민수] 적자생존의 비극 기사의 사진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조어(造語)는 꽤 많다. 선거의 여왕, 보수의 아이콘, 수첩공주, 불통여왕 등등. 탄핵정국에서 한때 회자됐던 한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적자생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환경에 가장 적당해야 한다는 진화론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다. 청와대와 내각 회의에서 대통령의 말을 빠짐없이 잘 받아 적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풍자적 조어였다.

인기가 높고 정권에 힘이 있을 때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디테일 리더십’으로 포장됐다.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지시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를 놓치지 않고 잘 적는 참모는 살아남고 그러지 못하면 언제 내쳐질지 모른다는 의미가 신조어에 담겨 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일장 훈시를 하고 모든 수석들은 고개를 숙이고 수첩에 받아 적는 모습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곤 했다.

그런데 이 적자생존이 대통령과 이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열심히 적어 살아남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 때문이다. 안 전 수석이 경제수석 시절부터 빼곡하게 적어온 업무수첩 50여권은 국정농단의 핵심 증거로 쓰이고 있다. 본인은 물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검이 박 대통령의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한 정도를 밝히는 데도 결정적 뒷받침을 하고 있다고 한다. 비망록으로 알려졌지만 김 전 수석의 메모도 사실 업무 일지에 가깝다. 그는 대통령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 및 발언을 일목요연하게 받아 적어 놨다. 김 전 실장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되는 과정에서 김 전 수석의 기록도 한몫했다.

안 전 수석에게 적자생존은 결국 비극이 됐다. 박 대통령에게도 깨알 같은 지시와 참모의 받아쓰기는 올가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 적자생존의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 있다. “무슨 초등학교 교실도 아니고, 대통령과 수석들이 국정에 관한 논의와 토론은 하지 않고 뭘 저리 지시하고 받아 적기만 하는지….” 정상이 아닌 일은 정상이 아닌 결과로 이어지는 게 세상의 순리인 것 같다.

한민수 논설위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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