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명호] 분노 정치, 그 너머로 기사의 사진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독재정권 시절 대학가 젊은이들을 깊숙이 찌르는 말이었다. 러시아 시인 네크라소프의 시구에서 따온 문장이다.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으로 1985년에 유죄선고를 받은 26살 유시민이 직접 쓴 항소 이유서 말미에 인용,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분노, 정의, 불의, 이런 단어는 감성에 불을 댕긴다. 이성이나 합리로는 설득·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단칼에 해결한다.

“분노가 빠졌다. 분노 없이 정의를 세우겠나.” 자신의 ‘선의 발언’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던진 두 마디는 안희정 충남지사에겐 카운터펀치였다. 이후 지지율 조사 추이를 보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 간 승자가 최종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들 한다. 그러니 진보다 보수다, 영남이다 호남이다, 중도층을 잡느냐 마느냐는 정략적 차원에서 곁가지일 수 있다. 핵심은 야권 지지층(넓게 잡아 중도층까지)을 얼마나 더 확고하게 붙잡느냐이다. 그런 결정적 포인트를 문재인과 그 주변이 놓칠 리 없다. 안희정이 ‘미르·K재단=선의’라고 표현했던 동영상을 보면 그가 하고자 했던 취지가 그렇지 않다는 걸 대충 알 수 있다. 문재인은 전체 맥락은 짐짓 모른 체하고 분노와 정의를 차용해 지지층의 감성에 확 불을 지른 것이다. 안희정은 사례를 잘못 든 뼈아픈 실수를 했고, 문재인은 그것을 100배 활용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분노가 차고도 넘치는 시기 를 지나고 있지 않은가.

와중에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정치인에겐 의도보다 더 중요한 게 결과다. 결과를 제대로 만들 책임이 정치인에게 있다”고 말했다. 안희정에겐 ‘의도보다 결과’를, 문재인에겐 ‘정치인의 책임’을 슬쩍 강조한 거 같다.

분노가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근본적 에너지라는 점은 틀림없다. 그런데 뭔가 가치 있는 결과를 내려면 분노를 넘어선 이성과 합리가 작동해야 한다. 분노에서 긍정적 결과를 끌어내는 능력을 우리는 리더십이라 부른다. 분노 정치, 맛은 사이다인데 내용 없고 허약하다. 정치지도자는 분노를 이해한 뒤 냉철과 이성의 영역에서 현상을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게 표엔 도움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30년 직업정치인 안희정이 그 발언에 대해 내심 자기 뜻을 굽힐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일단 사과는 했지만 이후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를 반대하려는 정치로는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

글=김명호 수석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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