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김정일, 北 영화수준 높이기 위한 선택은? 기사의 사진
신간 ‘김정일 프로덕션’은 북한의 김정일이 벌인 희대의 납치극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쓴 책이다. 사진은 지난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의 한 장면. 김정일(왼쪽)이 배우 최은희와 독대하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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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흔히 ‘극장국가’로 불린다. 각종 의례와 공연으로 통치되는 국가다. 상징과 예술을 통한 이미지 정치다. 국가는 극장의 무대다. 주연을 중심으로 조연과 엑스트라 및 각종 장치가 있다. 주연은 3대째 내려오며 늘 똑같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다. 극장국가의 면모를 갖춘 건 김정일 시대다. 선전·선동수단으로 가장 활용도가 높은 건 문화예술 분야. 김정일은 그중 영화에 집착했다. 어릴 때부터 영화의 매력에 흠뻑 빠진 영화광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1970년대 후반 아버지 김일성의 신임을 얻어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고심한다.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수장으로 영화예술 책임자였다. 그렇기에 당시 열악했던 영화산업의 수준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영화제작에 관한 경험이 전무했다. 전문가가 필요했다. 60년대부터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여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을 78년 1월과 7월 홍콩에서 잇달아 납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납치극을 소재 삼아 김정일 신상옥 최은희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북한 프로파간다(선전) 정치의 실상을 생생하게 그린 책이 ‘김정일 프로덕션’이다. 저자는 프랑스 출신 영화감독 겸 제작자인 폴 피셔. 납치 사건의 전말과 김정일의 이미지 정치를 독특하게 소설처럼 풀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황당하고 대담한 납치극’이란 부제가 붙은 책은 소설 형식을 빌려 재현했기에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 2015년 출판돼 세계 14개국 언어로 번역된 데 이어 한국에서 15번째로 출간됐다.

저자는 책을 쓰기 위해 신상옥과 최은희 회고록, 신문기사, 학계 논문 등을 수집했고 당시 북한에 체류했던 50명 정도를 인터뷰했다. 최은희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고, 북한도 방문했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납치된 뒤 김정일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1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첫 작품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84년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김정일이 직접 제작자로 나서고 신상옥 최은희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소금’은 85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줬다. 북한 최초의 SF 괴수영화 ‘불가사리’도 만들어졌다. 북한 영화의 역사가 바뀐 것이다.

김정일은 지독한 영화광답게 청년 시절 ‘100호 물자’라는 작전으로 영화 해적판 밀수사업을 벌였다. 할리우드 영화, 일본 야쿠자 영화, 코미디 영화, 에로물 등 최신 영화를 불법 복제해 방대한 자료를 구축했다. 그만큼 드라마 스토리 전개 방식, 쇼맨십 활용법, 신화 창조 능력에는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북한은 프로파간다라는 목적 아래 천편일률적 영화만 만들어냈다. 진부한 이야기뿐이었다.

김정일이 영화계 총책임자가 되면서 아낌없는 투자로 영화산업은 재정비된다. ‘꽃 파는 처녀’ 등 작품성 있는 영화들도 제작됐다. 그러나 야망을 실현하기에는 멀었다. 그즈음 신상옥과 최은희가 납치된 것이다. 두 사람은 영화계를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가 됐다. 물론 체제선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신상옥의 영화들은 지금껏 김정일이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 모두 담고 있었다. 섹스, 관능, 자유, 재미까지.”

신상옥 최은희는 김정일과 공식석상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나눴다고 한다. “김정일은 뛰어난 유머감각을 갖고 있었으며 신상옥과 최은희가 만난 북한 사람 중 가장 재미있는 인물이었다.… 김정일이야말로 전형적인 영화감독 기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영화업계는 신상옥 최은희가 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화정치’를 향한 김정일의 꿈도 종말을 알린다.

여기서 문제 하나. 김정일이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남녀배우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책 305쪽에 답이 있다. 박정태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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