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기획] 태극기 대신 책을 든 6070세대…  고단한 ‘스터디 그레이’ 기사의 사진
지난달 24일 60, 70대 장년층 4명이 서울 노원구 노원정보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다. 은퇴한 뒤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자격증·시사 공부를 하거나 돈을 들이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스터디 그레이’가 늘고 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은평구립도서관에는 고교생과 대학생들 틈에 60, 70대 9명이 끼어 앉아 있었다. 이들은 자격증 수험서를 노트에 부지런히 옮겨 적거나, 네다섯 권씩 쌓아놓은 소설을 읽거나, 신문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안모(62)씨는 6년째 법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매일 오전 8시30분 도서관을 찾아 12시간씩 책을 본다. 안씨는 “고령화로 인생 이모작, 삼모작 시대가 됐다”며 “도서관에 공인중개사나 토익 시험을 준비하는 노년들이 많다”고 말했다.

도서관을 찾는 ‘스터디 그레이’가 늘고 있다. 은퇴 후 새 일자리를 찾기 위해 자격증이나 시사 공부를 한다. 돈이 넉넉지 않은 노인들은 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보며 시간을 때운다. 이들은 “은퇴한 이들이 편하게 여가나 즐기며 산다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말한다.

노년의 노력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마포구립도서관을 찾은 우모(77·여)씨는 용돈 벌이를 위해 동화책을 읽는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어린이집 동화 구연’ 일을 계속하고 싶어서다. 우씨는 지난 반년 동안 3∼5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월 20만원을 받았다. 우씨는 “요즘 아이들은 웬만한 동화책 내용을 다 꿰고 있어 꾸준히 새로운 책을 읽어둬야 한다”며 “자식에게 의지하긴 싫고 모아둔 돈은 없어 동화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도서관을 찾은 노년들은 은퇴 뒤 재취업을 최우선 목표로 꼽는다. 지난해 말 정년 퇴임한 전직 공무원 구모(61·여)씨는 주택관리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구씨는 “합격하기 쉽다고 알려진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는 게 공무원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코스”라며 “유행에 따라 지난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지만 부동산을 개업하기엔 엄두가 안 났다. 대신 취직이 잘된다는 주택관리사로 방향을 돌렸다”고 설명했다.

노년의 ‘초입’에 선 이들도 도서관을 찾는다. 경기 고양에 사는 이모(59)씨도 2015년 명예퇴직한 뒤 1년을 도서관에 다닌 끝에 지난해 재취업했다. 전기배선을 까는 중소기업에서 일했던 이씨는 회사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은퇴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따로 영어를 배우거나 자격증 시험을 공부한 건 아니지만 신문을 보며 시사를 익혔다. 이씨는 “도서관을 다니며 50군데 넘는 곳에 자기소개서를 써 내다 보니 결국 한 중소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 2일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통계로 보는 사회보장 2016’에 따르면 2015년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한 상대적 노인빈곤율은 44.7%로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1.4%의 4배다. 상대적 노인빈곤율은 전체 노인 인구 가운데 소득이 국가 중위소득의 50%가 안 되는 노인 비율을 의미한다.

돈을 벌기보다 쓰지 않기 위해 이곳을 찾는 노인도 많다. 마포구에 사는 이모(79)씨는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돈 안 들이고 갈 수 있는 곳이 복지관, 도서관밖에 더 있겠느냐”며 “책을 읽는 데 거부감 없는 노인들은 시간을 보내려고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과 점차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도 도서관에 온다. 책은 언제든지 나를 상대해준다”고 덧붙였다.

도서관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하다. 장모(67)씨는 가족 및 복지관 친구들과 얘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신문을 읽는다. 장씨는 “더 이상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니 얘깃거리가 별로 없다”며 “신문이라도 많이 읽어야 남들과 얘기가 통한다”고 말했다.

연이은 탄핵반대 집회로 장년들의 모습이 거칠고 막무가내처럼 굳어진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장씨는 “앞으로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장년들을 바라볼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는 “사회는 점차 고령화되는데 빈곤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노년들이 은퇴를 해도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며 “노년들의 도서관행은 사회와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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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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