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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계, 페미니즘에 눈뜨다

연극 ‘남자충동’은 여성 혐오 대사·장면 수정… 최근 페미니즘 내건 작품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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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화 연출가의 데뷔 20주년을 맞아 새롭게 무대에 올린 연극 ‘남자충동’의 한 장면. 이번 공연은 1997년 초연과 2004년 재연 당시 여성혐오로 여겨진 일부 대사와 장면을 수정했다. 프로스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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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겸 연출가 조광화의 대표작 ‘남자충동’(26일까지 대학로 TOM 1관)이 인기몰이 중이다. 올해 공연은 1997년 초연, 2004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 배우 류승범의 출연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올해 공연은 예전과 눈에 띄게 달라졌다. 비틀린 가부장제라는 주제는 변함없지만 여성혐오로 느껴지던 일부 대사와 장면이 수정된 것이다. 예를 들어 10대 소년들이 강간 경험을 털어놔 여성 관객들의 거부감을 일으켰던 장면은 상황과 대사가 대폭 변경됐다. 그뿐 아니다.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남성성을 노골적으로 희화화시켜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이런 변화에 대해 조광화는 “최근 한국사회 여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연극 속 젠더 감수성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특히 박근형 연출의 ‘청춘예찬’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냉담한 반응을 보고 이 작품을 대폭 수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작품은 내 삶의 경험에서 출발한 것인데, 나 역시 초연 당시엔 인식 수준이 낮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성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연극계에서 페미니즘 담론과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청춘예찬’ ‘남자충동’ 등 한국연극계 대표작들이 페미니즘 시각에서 새롭게 논의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건 작품이 나오고 있다. 지난 2월 ‘아주 친절한 페미니즘 연극’과 지난 1∼5일 ‘페미수제 연극-메이크업 투 웨이크업’은 한국사회가 여성에 가하는 일상적인 폭력과 두려움을 다뤘다.

사실 연극계는 다른 장르와 비교할 때 그동안 유난히 페미니즘 이슈가 적고 논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남성 극작가와 연출가가 오랫동안 연극계의 주류였던 만큼 여성 서사는 적었고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도구에 머물러 왔다. 지난해 문화예술계를 강타한 ‘예술계의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도 연극계는 유난히 조용했다. 피해 사례가 없어서라기보다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집단작업으로 이뤄지는 제작방식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와 관련 연극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곳은 남산예술센터다. 이곳은 지난해 ‘페미그라운드’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여성혐오 및 젠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제작에 참고한 것이다. 올해는 아예 공동 제작하는 극단과 제작진을 대상으로 성폭력 관련 교육을 받는다는 내용을 협약서에 포함시켰다. 우연 극장장은 “몇 줄의 협약문장과 두 시간의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겠느냐는 지적도 나오지만 이런 시도가 연극계에서 성 인식에 대한 토론 기회를 확장시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남산예술센터는 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다룬 구자혜 연출의 ‘가해자 탐구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를 기획공연으로 올린다. 4월 21∼30일 공연되는 이 작품은 예술계에서 가해자의 변명과 자기방어만이 아니라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키지 않는 구조적 문제점을 겨냥하고 있다. 구자혜는 “예술계는 예술이라는 대의 아래 강렬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권과 처우 등에 대해선 오히려 폐쇄성을 띠고 있다”며 “누군가 내게 이번 작품으로 연극계에 폭탄을 던지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편하고 이상한 진실을 발언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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