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사회를 세련되게 만드는 음악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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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을 집필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해박한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의 정치적 입장이 예술과 문화의 향유에 관여한다고 보았는데, 특히 주시한 것은 음악의 비음악적 영역에 대한 ‘침범’이다. 그는 이 침범을 부정적 폭력으로 보는 대신 영역의 경계를 초월하고 그에 도전함으로써 기대 이상의 발전과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음악계에서 사이드의 ‘음악적 침범’을 적용할 수 있는 ‘현상’이 바로 윤이상(사진)이다. 여기서 ‘인물’이 아닌 ‘현상’이라 칭한 이유는 그 이름의 영향이 음악 외적인 영역에까지 뻗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예술가는 아니었다. 한국 전통음악을 추구한 것도 애국심보다는 독창성을 위한 시도였다. 1963년 방북은 평안남도 강서고분 벽화의 ‘사신도’를 보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자녀들을 그대로 남한에 남겨두고 방북했을 정도로, 그의 행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용건이었다.

이러한 순수한 음악적 동기는 그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1967년 6·8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관련자만 200명이 넘는 ‘해방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고 반대 시위는 잠잠해졌다. 하지만 검거된 이들의 북한 접촉은 정치적이기보다는 개인적 동기가 강했고 ‘지하조직’의 존재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듬해 대법원은 이들에게 국가보안법과 간첩조항이 무리하게 적용되었다고 판결을 내렸음에도 윤이상에게 새겨진 ‘간첩’이란 주홍글씨는 없어지지 않았다.

윤이상의 작품에 시대적 메시지가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 동백림 사건 이후의 일이다. ‘광주여 영원히’ ‘나의 땅, 내 민족이여’ 등과 같은 작품들이 연이어 작곡되었다. 그러나 이 음악들은 독재에 반대하고 통일운동을 격려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뿐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의 음악은 사상을 초월해 민족의 보편적 안녕과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윤이상의 ‘음악적 침범’은 반대 세력에 습관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오만함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사상적 왜곡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의 음악은 뜻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남한에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왔다. 동백림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만에 지휘자 원경수는 윤이상의 ‘례악’(禮樂)을 연주하며 그를 지지했다. 1994년 예음문화재단은 민간단체로서는 최초로 윤이상 음악제를 개최하며 작곡가의 귀국 운동을 추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대 말 작곡가의 고향 통영을 거점으로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음악가들의 주도로 개최된 ‘윤이상 음악제’는 오늘날 ‘통영국제음악제’로 발전했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 후보가 단독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보수의 온상임에도 이 도시의 윤이상에 대한 자부심은 여야 할 것 없이 각별하다. 도천테마파크(윤이상 기념공원)의 이중도 팀장은 “보수 정권 이후 국가 지원이 위축되는 와중에도 시와 시의원, 시민들의 음악제에 대한 지지는 변함없었다”고 증언한다. 행사 추진을 위해 유입된 외부 인력에 대한 지역 세력의 배제나 기득권 다툼도 통영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음악제를 주도하는 통영국제음악재단의 대표는 이례적으로 독일인이다. 사상적 양극화로 황폐해진 한국사회에서 이 변방의 도시가 보여주는 예술에 대한 세련되고 유연한 태도는 확실히 사상을 초월한 남다른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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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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