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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손영옥] 물 들어올 때 노 버리는 리움

기업 브랜드 이미지 제고가 수익에 도움돼… 최순실 게이트 탓에 문화사업 축소 아쉬워

[내일을 열며-손영옥] 물 들어올 때 노 버리는 리움 기사의 사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어머니 홍라희씨가 이달 초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직을 사퇴했을 때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삼성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오너인 이 부회장이 구속되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뒤 미래전략실 해체, 사장단 수요회의 폐지 등 이미지 개선책을 내놓은 터였다.

이틀 뒤엔 홍씨의 여동생 홍라영 총괄 부관장도 사표를 썼다. 오너 일가가 손을 뗌으로써 전문경영, 투명경영을 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준다는 정무적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여야 했다. 리움은 인적 쇄신에 그치지 않고, 올해 예정된 기획전을 모두 취소한다고 밝혔다. 한 달 뒤 예정된 ‘김환기 회고전’까지 거둬들였으니 그야말로 전격적인 결정이다. 리움은 이제 소장품을 바탕으로 상설전만 연다. 미술관이 갖는 핵심 기능인 전시 기획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소장품 수장고로 ‘식물적 미술관’으로만 남겠다는 것이다.

이번 결정을 둘러싸고 다른 해석도 나왔다. 이 부회장은 부친과 달리 실용주의자인데다 기업은 물건 잘 만들고 마케팅 잘해 많이 팔면 된다고 생각하며, 사회공헌이 필요하면 돈으로 기부하면 되지 굳이 기업이 나서 문화사업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는 얘기다.

여하튼 리움의 전격적인 조치는 국내 재벌의 문화사업 트렌드와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카드는 번듯한 컬렉션 하나 없다. 그럼에도 전시를 후원하는 문화공헌 사업을 벌이고 있다. 기업 브랜드 이미지 제고가 수익에 플러스가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리움은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 사태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그래서 재벌 미술관이 기업의 검은돈의 세탁처라는 부정적 시선이 따라다니지만 그런 인식을 조금씩 희석시킨 건 리움이 보여준 전시의 힘이다. 자본과 우수 인력 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 조각가 애니시 커푸어, 미국 설치 미술가 매슈 바니 등 국립현대미술관이 1년 예산을 투입해도 데려올 수 없는, 세계적 거물들의 전시를 열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서도호, 양혜규 같은 중량급 작가를 대중에게 알렸다. 서도호 개인전 때는 리움 앞에 관람객이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기획전 ‘코리안 랩소디’는 한국 근·현대 미술 작품을 역사와 기억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 극찬을 받았다. 한 공공미술관 관장은 “리움은 훌륭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공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매머드급 사립 미술관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했다.

근년 들어 리움이 더욱 돋보였던 건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만들어 40세 이하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했기 때문이다. 2014년 제1회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수상한 이완 작가. 2004년 동국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교수에게 사정해 학교 구석에서 작업하기를 9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즈음 리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트스펙트럼 후보 중 1명에게 주는 작가상을 받은 그는 날개를 달았다. 올해 미술계 올림픽인 베니스비엔날레 한국 대표작가가 된 것이다.

이런 기획전이야말로 재벌 미술관 리움이 세간의 편견에서 비켜나 미술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자본만이 할 수 있는 착한 일’이다. 하지만 아트스펙트럼 작가상도 폐지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물 들어와 노 저어야 할 때인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데….” 스캔들 탓에 삼성이 문화사업에 보수적으로 돌아선 데 대한 우려가 곳곳에서 들린다. 손영옥 문화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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