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고승욱] 인왕산 멧돼지 기사의 사진
인왕산은 기세가 남다르다. 높이가 300m 조금 넘는 낮은 산인데도 오르다보면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서울성곽 옆 계단길은 조금 아쉽지만 일단 기차바위 능선에 오르면 느낌이 달라진다. 조선의 풍수학자들은 이곳을 ‘늙은 호랑이의 등줄기’라고 표현했다. 북한산 보현봉과 비봉능선을 눈에 담은 뒤 치마바위를 향해 걸음을 옮길 때면 맑은 날에도 몸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호랑이 등줄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에게 호랑이가 사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인왕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인왕산과 안산을 잇는 무악재는 수십명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넘었다. 언제 호랑이가 나타날지 몰라서였다. 인왕산 정상에서는 포효하는 범바위가 보이고, 산 아래에는 무인들이 활을 연습하는 백호정이 있었다. 심지어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라는 속담도 있다. 호랑이가 인왕산을 몰라서 되겠느냐고 질책하는 말이니, 어떤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뻔한 사실이라는 뜻이다.

호랑이에 친근한 이미지가 덧붙여지면서 인왕산 호랑이는 잘난 사내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 국어사전은 ‘몹시 무서운 사람’이라고 풀이했지만 어감은 훨씬 친숙하다. 지금 인왕산 호랑이라고 하면 드라마 ‘각시탈’의 주인공 주원처럼 잘생기고 멋있는데 친절한, 그러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번개처럼 나타나 악당을 물리치는 슈퍼맨 같은 이미지가 먼저 연상된다.

그제 멧돼지 한 마리가 광화문광장으로 거침없이 진출했다. 인왕산에서 출발해 청와대 옆 서촌 주택가를 거쳐 서울경찰청과 외교부청사 앞을 검문도 받지 않고 유유히 지났으나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로드킬’로 삶을 마감했다. 2016년 서울에서 119 구조대가 멧돼지가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게 548차례다. 통계적으로는 이틀에 세 번 꼴로 사람 사는 동네에 멧돼지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광화문광장의 멧돼지도 심각한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왕산에 사는 멧돼지라고 하니 곳곳에서 한마디씩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에서처럼 총에 맞아 재앙신이 된 멧돼지일까. 아니면 호랑이가 탄핵된 뒤 실시된 선거에서 토끼와 여우에게 승리한 멧돼지일까. 그도 아니면 뒤늦게 촛불집회에 가고 싶었을까. 물론 모두 웃으라고 하는 소리다. 그러나 하릴없는 농담 속에 아련한 애틋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글=고승욱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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