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한민수] 보수의 굴욕 기사의 사진
캐스팅보트(casting vote)의 사전적 의미는 의회의 의결에서 가부 동수가 나올 때 의장이 가지는 결정권을 말한다. 정치에서는 선거 때 박빙의 승부를 결정지을 핵심 지지층 또는 그런 지역의 유권자를 통칭해 왔다. 지난해 4·13총선의 경우 수도권과 30, 40대 표심이 야권에 쏠리면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승리에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50대와 60대 이상이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그런데 5·9 조기대선을 앞두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깜짝 놀랐을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저서 등을 통해 한국의 유권자 지형이 보수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을 주장했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보수는 역대 선거에서 주축을 담당해 왔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매번 그랬다.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는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층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진보진영 표를 긁어모으다시피 한 다음 김종필로 대변되는 원조 보수 표를 더해 겨우 이겼다. 노무현 대통령도 비슷했다. 한마디로 보수가 똘똘 뭉치면 못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영 딴판이다. 선거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전통의 보수’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보수정당을 대표해 출마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지지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3% 밑이다. 진보 측의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각각 30%대의 지지율로 1, 2위를 다투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이번 대선에서는 보수가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늘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홍 후보와 유 후보의 대선 득표율 합계가 15%를 넘느냐, 못 넘느냐에 따라 다음 대통령의 향배가 결정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홍·유 후보가 15%를 넘어 20%에 근접한 득표를 하게 되면 진보성향의 야권 지지표가 확고한 문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지만, 반대로 두 후보가 15% 미만의 득표를 할 경우 안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진다는 것이다. 안 후보가 보수 표를 대거 흡수한다는 추정에서다. 문 후보 측에서는 보수가 선전해야 유리해지는 것이다. 어쨌든 원조 보수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이런 전망까지 나도는 조기대선판이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글=한민수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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