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하윤해] 보수의 토로 기사의 사진
전화기 너머 바른정당 고위 관계자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선거가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차가운 민심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면 절망감을 느낀다”면서 “자존심 강한 유승민 후보가 ‘배신자’ 소리를 참으면서 유세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털어놓았다. “이러려고 탈당했던 것은 아닌데…” 긴 한숨이 이어진다. “모든 게 우리의 잘못이다. 설령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지더라도 바른정당의 패배이지, 우리가 꿈꾼 새로운 보수의 패배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바른정당이 고뇌에 빠져 있다면 자유한국당은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문재인 안철수 홍준표’ 3자 대결로 가면 승산이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말이 달라진다. 한국당 고위 관계자는 “대선을 자기 일처럼 뛰는 사람이 몇 안 보인다”면서 “당 분위기를 보면 대선이 ‘남의 일’ 같다”고 실토했다. 한국당 의원들은 대선보다 대선 이후에 더 관심이 쏠려 있는 것 같다. 대선에 지더라도 강한 보수 야당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선 이후에 있을 당권 경쟁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당과 바른정당은 대선 때만 되면 ‘기호 1번’을 놓치지 않고 돈 걱정이라는 걸 몰랐던 공룡 정당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힘겹다. 속사정은 다르지만 한국당과 바른정당의 공통점도 있다. 후보와 의원들이 따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가끔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을 며칠 앞두고 ‘기각설’ ‘각하설’이 나돌았었다. 진원지는 친박(친박근혜) 진영이었다. 한 친박 의원은 “언론이 헌재 내부 사정을 모르고 기사를 쓴다. 탄핵은 기각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8대 0’으로 탄핵이 인용된 이후 그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의원은 “탄핵이 인용될 걸 몰랐던 사람이 있었겠나. 하지만 어떻게 우리 입으로 그 말을 하나”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최소한 ‘뻔뻔한’ 거짓말은 사라졌다. 범보수 진영에서 요즈음 나오는 가장 낙관적인 말은 “힘들지만 승산이 없는 게 아니다” “선거판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정도다.

분위기도 달라졌다. 과거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출마했을 때는 후보 근처에 있으려는 의원들과 이들을 떼어 놓으려는 후보 측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그러나 지금 범보수 정당 의원들은 맥이 풀려 있다. 전장을 누벼야 할 장수들이 의원회관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다. 대구·경북에 지역구를 둔 한 의원은 “서울에서 전화가 오면 지역구에 있다고 하고, 지역구에서 전화가 오면 서울에 있다고 둘러댄다”고 고백했다. 정보를 쥐고 흔들었던 중진 의원들이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선거가 어떻게 돌아가나?”라고 묻는 게 보수의 민낯이다.

바른정당 다른 의원 얘기다. “TV토론을 봤다. 솔직히 유승민 후보가 제일 잘하지 않았느냐. 안철수 후보에게 기대가 있긴 하지만 문재인 후보나 안 후보나 불안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아니냐. 이들에게 나라를 맡겨도 될는지 걱정이 앞선다”고 털어놓았다. 한국당 중진 의원은 문 후보 측에 충고와 경고가 섞인 말을 던졌다. 그는 “적폐 소리를 들어도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문 후보 진영을 보면 5년 전 우리 모습을 보는 듯하다. 우리도 대선 승리만 생각해 국민을 갈라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반면교사 아니냐. 그들도 달라지지 않으면 5년 뒤 우리 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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