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남자는 어디에 있느냐

[시온의 소리] 남자는 어디에 있느냐 기사의 사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간결한 판결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현행범으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예수님께 질문했다. 그때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고 계셨다. 그들의 재촉에 일어나신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고 짧게 말씀하셨다. 간음한 여자만 남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놀라운 재판은 간음한 여인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책략을 수포로 돌렸으며 군중의 숨은 양심을 깨우쳤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땅 위에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 아마도 ‘남자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쓰지 않으셨을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는 여인을 붙잡아 왔는데 간음한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감쪽같이 사라진 것 같지만 증거가 남았다. 그것은 성서의 “간음하다가”라는 단어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 8:4). 희랍어 원문 속에는 ‘간음하다가’에 해당하는 단어가 강한 능동태가 아닌 약한 수동태로 표현돼 있다. 여인의 간음이 적어도 자발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성서 주석가는 그가 유대 땅을 지배하던 로마 군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남자가 현장에서 사라진 이유다. 유대의 남자들이 로마 군인을 붙잡아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테니까. 그 남자는 로마의 권세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다.

유대 남자들은 여인만 붙잡아 놓고 돌로 치려한다. 간음한 여인은 살려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여인은 누구인가. 자신들의 누이요 아내요 딸이 아닌가. 그들은 여인 앞에 모세의 율법을 내세우지만 정작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 뒤에 숨어 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을 누이요 아내요 딸인 여인에게 묻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앞세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식민주의자들의 압제나 민족주의자들의 열광이나 ‘다 그놈이 그놈이다’. 누구도 그녀의 편에 서지 않는다.

병자호란 때 수많은 조선 여인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다. 숱한 고초를 겪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의 남자들은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졌다. 그 여인들을 가리킬 때 불렀던 환향녀(還鄕女)는 지금까지도 치욕적인 욕이다.

예수님 앞에 끌려온 여인은 이스라엘의 환향녀였던 것이다. 유대 남자들은 돌을 던지려 하는데 예수님은 말없이 땅 위에 무언가를 쓰실 뿐이다. “남자는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이 “법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녀는 바로 죽었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 ‘쉽고 옳은’ 말씀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위험한’ 말씀이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기 시작했다. 손에 든 돌을 내려놓고 하나둘 뒷걸음질 쳤다. 예수님은 저들의 요구에 답을 주지 않고 오히려 저들의 요구 속에 숨은 악(惡)을 깨닫게 하셨다. 자신들 가운데 숨어있던 그 남자, 바로 그놈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둘러싼 사건의 최대 함정은 죄가 무리 가운데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악을 객관화해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빠르고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이 우리 가운데 숨어 있다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도 숨어 있는 많은 죄가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지난 부활주일은 세월호 3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드디어 침몰됐던 배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우리가 붙잡아야 할 그는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그를 붙잡았는지 의심스럽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지, 나는 과연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인양돼 올라온 세월호를 바라보는 우리의 낯이 뜨겁다. 그 남자는 어디에 숨은 것일까. 나의 숨은 죄를 고백할 때 이 시대의 죄 또한 드러나지 않을까.

박노훈 목사(서울 신촌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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