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才人 김영애, ‘여자의 일생’ 기사의 사진
배우 김영애의 삶은 먹먹하다. 노래 ‘봄날은 간다’의 가사처럼 애절하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백설희 노래)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오는 건/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거야’(김윤아)

췌장암이라는 극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무대를 지키려 했던 김영애. 미디어가 ‘죽는 순간까지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다’라고 규정했으나 그 문장이 너무 건조하다.

삶의 모순. 김영애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주인공 잔느처럼 세파에 휘둘렸다. 배우로서 행복했고 여인으로서 불행했기 때문이다. 그 불행을 이기고자 마지막까지 무대 위에서 고독한 싸움을 벌였다. 울고 싶은 그 무서운 욕망을 무대 위에서 쏟아냈다.

무대 위 김영애.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변호사’에서 보여주었던 인고의 어머니상이었는가 하면 영화 ‘깊은 밤 갑자기’ ‘겨울나그네’ 등에서 보여준 몽환과 관능의 여인상이기도 했다. 0.1초의 암전만 주어져도 인고와 관능을 번갈아 담아내는 천생 배우였다. 영화 ‘카트’ ‘판도라’ ‘특별수사’ 등에도 출연했다. 사회와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이라기보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거냐고 묻는 영화”(‘변호사’ 인터뷰 중)라는 답에서 알 수 있듯 정 많은 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대 아래 김영애. 누구에게라도 의자나 방석을 끌어주며 앉히고 밥을 먹었느냐고 묻는 다감한 성품이었다. 고모가 조카 대하듯 늘 다정했다. 한데 이 다정다감을 사람들은 빈틈으로 여기고 파고들었다. 그것도 지독하게.

그를 본 것은 1995년 ‘모래시계’ 마지막 신을 지리산 노고단에서 찍을 때였다. 빨치산을 남편으로 둔 ‘태수 어머니’ 김영애가 노고단 고사목 아래서 남편의 재를 뿌린 뒤 기차에 뛰어들어 한 많은 생을 거두는 장면. 시청자들은 그 장면을 보며 시리도록 아파했다. 저토록 처연하다니…. ‘울고 싶은 욕망’이 그때도 진행 중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빈틈을 파고든 사람들로 인한 고통.

김영애는 명문 부산여상을 나와 은행원을 하던 똘똘한 여성이었다. 스물한 살에 우연히 MBC 탤런트 공채 시험에 응시해 연기자가 됐다. 그리고 2∼3년 후 곡절 끝에 결혼했다. 이미 자녀가 셋이었고 하나를 낳았다. 20대 초반 여성이 감당하기 힘든 여건이었다.

훗날 “연기는 숨구멍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처지를 뒤로하고 의자를 끌어 주변 사람에게 다감하게 대했다. 그럴수록 빈틈을 파고드는 이들이 생겼다. 삶의 모순을 이기고자 기치료와 명리에 의지한 것이 모순을 심화시켰다.

그는 이혼을 했고 몇 년 후 결혼을 했다. 새 동반자와 황토사업을 했고 담보에 도움이 될까 하여 서울 구기동 평창동에 집을 두 채나 사기도 했다. 그중 한 채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이회창 전 대법관 집이었다. 세간에 화제였다. 그럼에도 사업에 실패하고 빚지고 이혼했다.

모파상의 잔느는 오직 혼자였고, 한없이 늙어 있었다. 아내로서도, 어머니로서도 모두 실패한 여자였다. 식구들이 남긴 빚으로 인해 살던 저택까지 넘겨주어야 했다.

남편의 정부였던 하녀 로잘리가 잔느에게 말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잔느가 중얼거리듯 답한다. “나는 정말 운이 나빴어. 모든 일이 나쁜 쪽으로만 풀려 나갔지.”

세상에는 영혼의 약탈자들이 너무 많다. 김영애는 죽기 전 “하나님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만 살아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정과 사랑에 주리는 자가 복이 있다. 2017년 4월 재인(才人) 김영애 졸.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국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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