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시칠리아, 꿈 속의 도시들 기사의 사진
황주리 그림
마피아의 고향 ‘시칠리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말론 브란도가 열연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일 것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는 소년의 성장영화인 ‘시네마 파라디소’의 마지막 장면도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동쪽 작은 항구도시 ‘체팔루’에서 찍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해변 벤치에 앉아 사진도 찍어보고 한적한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그 영화를 보았던 날들이 내게도 까마득한 옛일임을 깨닫는다. 같은 감독이 만든, 개인적으로 가장 잊을 수 없는 영화 중 하나인 ‘말레나’ 역시 시칠리아의 중세도시 ‘시라쿠사’에서 찍었다. 모니카 벨루치가 뭇 남성들의 시선과 여자들의 시샘을 받으며 하이힐을 신고 광장을 가로지르며 걸어가던 장면을 찍은 시라쿠사의 두오모 광장을 걸어가는 기분은 묘했다. 밤이 되면 시라쿠사의 광장은 더욱 은은하고 화려하게 빛난다. 구 시가지의 좁고 긴 골목을 따라 걷다가 카페에 들어가 시칠리아 산 와인을 한 잔 하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영화의 명장면들을 떠오르게 하는 도시들을 실제로 밟아보는 시칠리아 여행은 친밀감과 신기함을 동시에 주었다. 그곳들은 실로 오래도록 꿈꾸었던 꿈속의 도시들이었고, 실제로 그 땅을 걸으면서도 꿈속인 듯 아련했다. 기억 속에서 내게 시칠리아 여행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이 도시가 떠올랐다 다른 도시가 떠올랐다 하다가 한꺼번에 뒤섞여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도시가 되기도 한다.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중세시대의 마을 ‘예리체’에 밤이 오면 좁은 골목길 흐린 불빛 사이로 몽환적인 풍경이 된다. 모자이크 식 돌을 깔아 만든, 바닥이 은회색으로 빛나는 그 고풍스러움에 감탄하며 아무도 모르게 떼어다가 우리나라 인사동 길바닥에 깔아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유적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계곡에서 문명의 흔적들을 걸어본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다가 날개가 타버려 추락한 이카루스의 날개를 표현한 거대한 현대 조각품이 무너진 신전들 앞에 놓여 있는 풍경은 문명비판적인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해지기 전 신전의 계곡 남서쪽 해변에 위치한 석회암 절벽 계단 ‘스칼라 데이 투르키’에 오른다. 석회암이 오랜 세월 비와 바람에 깎여 만들어진 계단은 마치 눈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하얗게 빛난다. 꼭대기에 올라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린다. 해가 지고 나면 또 다른 경관을 연출하는 그곳에서 동영상을 찍으니 풍경에 더해진 사람들의 실루엣이 흑과 백으로 남아 마치 그림자 연극을 보는 것 같다. 풍경에 사람이 더해지는 그림이 아름답다는 걸 처음으로 느껴본다.

또, 잊을 수 없는 보석 같은 도시가 ‘칼타지로네’이다. 이곳을 포함한 ‘노토’ 등의 시칠리아 동남부 도시들은 1693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사라졌다가 바로크 양식과 고도의 건축기술로 폐허 위에 재건된 도시들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도자기로 유명한 칼타지로네에는 컬러풀하고 화려한 타일로 장식된 142개의 도자기 계단이 만들어졌다. 여행객들로 몸살을 앓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계단 예술품이 아닐 수 없다. 계단 끝까지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저 멀리 도시의 사람 사는 모습들도 아스라하게 보이고, 가방을 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여행객의 실루엣도 풍경에 더해져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칼타지로네의 계단을 내려왔다. 언제 다시 올까 싶어 자꾸만 뒤돌아보니 어느새 계단은 저 멀리 작아져 사라졌다.

에트나 화산에 올랐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언제 또 폭발할지 모른다는 움직이는 산의 살아 있음을 눈으로 만끽하고 영화 ‘그랑 블루’를 찍었다는 아름다운 해변도시 타오르미나에 짐을 풀었다. 바닷속 삶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깊은 성찰로 그려낸 ‘그랑 블루’ 역시 잊을 수 없는 영화다. 예쁜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은 타오르미나 중심가인 움베르토 거리를 걸으며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시칠리아 커피를 마신다. 문득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그러다 문득 시칠리아 여행 초입에 가보았던, 관광 명소인 팔레르모의 ‘카타콤베’ 생각이 났다. 그곳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미라 형태의 수천 개 시체가 벽에 다닥다닥 걸려 있는 시체 박물관이다. 박제된 시신들은 편안한 얼굴, 고통스러운 얼굴 등 살아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같은 표정이 하나도 없다. 몇 백 년 전에 죽은 사람들 표정들에 모골이 송연해지며 삶과 죽음이 그리 멀지 않다는 자각에 흠칫 놀란다.

시칠리아는 내게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 곳이었다.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었는데도 다시 가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큰 소리로 ‘시칠리아’ 할 것 같다.

황주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