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지훈] 꽃을 기다리는 마음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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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이면 서가에서 꺼내 읽는 소설이 있다. 윤대녕의 단편 ‘상춘곡’이다.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당신께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작품을 읽고 나면 마음이 질펀해지면서 또다시 봄이 왔구나 생각하게 된다. ‘상춘곡’은 저 아련한 도입부에서 짐작할 수 있듯 누군가에게 띄우는 서간체 소설이다. 수신인은 서른여섯 살 주인공 ‘나’가 젊은 시절 아프게 사랑했던 한 여자. 그는 10년 만에 경기도 포천에 사는 그녀를 찾아가고, 헤어질 때쯤 두 사람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멀리도 가까이도 말고 그저 계절이 바뀔 때만이라도 한 번씩 봤으면 싶군요.”

“지금은 캄캄해서 안 보이지만 4월 말이 되면 요 앞산에 벚꽃이 가관이에요. 그때 오셔서 막걸리 한잔씩들 하고 가세요. 볼품이 없긴 하지만 마당에 평상이 하나 놓여 있으니까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일까. 주인공은 남쪽으로 내려가 ‘벚꽃을 몰고 등고선을 따라 죽 북향’하기로 결심한다. 4월 초하루에 내려가 둥지를 튼 곳은 전북 고창. 그는 이곳에서 추억과 회한이 담긴 편지를 써내려가고, 편지는 곧 소설이 된다.

해마다 ‘상춘곡’을 읽었지만, 올해엔 이 책을 보다가 무슨 까닭에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여자는 날짜를 못 박지 않고 꽃이 필 때쯤 다시 보자고 말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소설이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꽃이 피거나 질 때쯤을 기한으로 정해 훗날의 만남을 기약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먼저 생각나는 건 정일근의 시 ‘사월에 걸려온 전화’. 시인은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사춘기 시절 첫사랑 그녀로부터 걸려온 전화다. “꽃이 좋으니 한번 다녀가라.” 시인은 그녀의 말에 코끝이 매워진다.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애 사월 꽃 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어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이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상춘곡’에서는 주인공이 선운사 주변을 거닐다 미당의 유명한 시 ‘선운사 동구’가 새겨진 시비(詩碑)를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시는 소설 속 이야기와 절묘하게 포개진다. 특히 ‘선운사 동구’의 탄생을 둘러싼 뒷이야기에는 ‘상춘곡’이 그렇듯 작중 화자와 한 여인이 꽃이 필 때쯤 다시 만나자는 말을 주고받은 스토리가 숨어 있다.

미당은 또 다른 작품 ‘아버지 돌아가시고’를 통해 ‘선운사 동구’의 탄생 배경을 전한 적 있다. 때는 1942년. 부친을 여의고 무참한 기분으로 찾아간 주막, 이곳에서 시인은 ‘나이 40쯤의 꼭 전라도 육자배기 그대로의 여인’과 얼얼해질 때까지 술잔을 주고받는다.

시인이 주막을 떠나려 하자 여인이 말한다. “동백꽃이 피거들랑 또 오시오.” 세월이 한참 흘러 주막을 다시 찾았을 때 여인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때의 경험이 ‘선운사 동구’의 바탕이 됐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과연 여인은 동백꽃이 필 때마다 시인을 기다렸을까.

해후의 날짜를 정하지 않고 꽃이 필 때 당신을 찾아가겠노라, 혹은 그때쯤 나를 다시 보러 오시라 당부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본다. 두루뭉술하게 기한을 정해놓으면 그만큼 기다림의 행복을 길고 진하게 느낄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억지스러운 해석이겠지만 실제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곧 희망이고 그리움일 테니까.

이런 기다림은 꼭 남녀 간의 일만 가리키는 건 아니다. 지난가을부터 주말이면 광장을 밝힌 그 촛불들의 마음도 그랬다. 광장에서 어깨를 겯고 촛불을 든 사람들 표정이 하나같이 밝고 환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언가를 기다리는 행복이 나와 당신의 마음을 달뜨게 만들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모두가 한마음으로 무언가를 기다리는 건 근사한 일이니까.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끝이 났다. 당신이 바라지 않은 대통령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또 다른 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창밖에는 봄이 지나가고 있다.

글=박지훈 문화부 기자 lucidfall@kmib.co.kr, 삽화=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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