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박형준] 큰 그림을 그려보라! 기사의 사진
새 정부가 의욕적인 출발을 보이고 있다. ‘탄핵의 비극’을 낳은 직전 정부의 국가 경영이 결함투성이였기 때문에 문재인정부는 조금만 잘해도 그 ‘기저효과’를 누릴 수 있다. 먼저 ‘통합’을 국정의 원칙으로 천명한 것은 현명했다. 편 가르기 우려를 해소하고 찍지 않은 68%(비투표자 포함)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소탈한 대통령의 격의 없는 업무 태도 역시 탈권위주의 대통령 이미지 구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 며칠을 보면 당선자 측이 인수위가 없는 상황을 대비해 상당한 국정 준비를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인수 작업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판자가 아니라 주체로서 국정 현안을 파악하는 일, ‘희망사항’으로 가득 찬 공약들을 정책으로 전환하는 일, 국정 과제의 우선순위를 정비하는 일 등은 취임 이후라도 꼭 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를 수행할 국정기획위원회를 설치한다고 한다. 적절한 조치로 여겨진다.

이 위원회가 할 많은 일 가운데 한 가지만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큰 그림(Big Picture)을 제대로 그려보라는 것이다. 종전의 인수위들은 현황 파악하랴, 공약 챙기랴, 실무 작업에 빠져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간과하곤 했다. 여기서 큰 그림이란 대한민국이 역사의 좌표 속에 어디에 놓여 있는가, 문명사와 현대사의 큰 흐름 속에 이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 속에서 이 정권 5년간 국가의 역할과 소명은 무엇이고 어떤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전체상을 청사진으로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나무를 그리기 전에 숲을 먼저 살펴보라는 것이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이런 작업을 일부에서는 구름 잡는 얘기라 치부하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다. 예술과 과학의 총화인 건축에서도 좋은 건축물이 나오느냐의 여부는 기본 설계, 즉 개념 설계에서 거의 판가름난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찾는 이유가 그들의 빅 픽처, ‘생각의 힘’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에 대한 건축가의 통찰이 공간에 대한 창의적 해석과 심미성으로 구현되지 못하고 기능적 필요만을 충족시키는 건축은 밋밋한 구조물일 뿐이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은 묘수 때문이 아니다. 빅데이터를 토대로 바둑판 전체의 흐름을 보는 능력, 즉 빅 픽처를 구성하는 능력에서 압도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바다에 대한민국호의 좌표를 그려보라. 항로를 다시 짜야 할 엄청난 기상 변화와 다각 파고들이 몰려오는 게 보일 것이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40억년 지구 역사에서 처음으로 생명이 비유기물질 안으로 들어가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인간 자신이 지적 생명체의 설계자로서 신의 역할을 대신하고자 하는 인공지능 혁명 시대는 인간과 자연, 삶과 노동에 대한 기존 패러다임이 모두 바뀔 수 있는 변화를 예고한다. 단순히 산업 구조 변화와 경쟁력 차원에서 얘기되는 4차 산업혁명 담론은 얼마나 시야가 좁은가. ‘재수 없으면 150세까지 산다’는 자조적 풍자까지 나오는 ‘인생 혁명 시대’에 기존 삶의 모델에 뿌리를 둔 복지, 일, 가족, 교육의 관념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삶의 표준 모델을 다시 짜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신화를 만들었던 지난 60년 발전국가 모델의 설계 수명이 다해 감은 이미 고지되어 있다. 성장제일주의, 공리주의, 국가중심주의에 계속 의존해서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대선 과정에서 우파도 좌파도 기존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비전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일자리와 복지 늘리겠다’, ‘성장률 올리겠다’는 범주 내에서 논쟁했을 뿐 시대 교체와 국가 패러다임의 근원적 변화를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사유와 상상력의 한계’ 때문에 대증적, 상투적인 해법만이 난무하는 게 아쉬웠을 뿐이다.

새 정부가 낡은 진보의 틀에 갇힌 정권이 아니라면 미래를 개척하는 시간의 창조라는 의미로 자신의 ‘진보성’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구성될 국정기획위원회가 좋은 장이 될 수 있다.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만 구성되는 기획위원회가 아니라 차제에 대한민국 전체의 빅 픽처를 그릴 수 있는 인재들을 모아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위원회로 운영했으면 한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대한민국 지성이 ‘생각의 힘’을 발휘하는 장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잘만 조직되고 운영된다면 그 자체 국가 비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모아내 국민 통합의 기반을 제공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좋은 설계 없이는 결코 좋은 집이 지어질 수 없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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