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자동응답전화기 기사의 사진
원고를 쓸 때 변천사를 보관해두는 작가도 있지만, 나는 최종 원고를 완성하면 그 이전 것은 모두 폐기해버리는 쪽이다. 초고라든지, 각종 자료들을. 이유를 물어보면 보다 위대한 작가로 남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둘러대는데, 실은 그저 습성인 것 같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초등학교 때 일기를 버렸고,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1학년 때 일기를, 3학년이 되어서는 2학년 때 일기를 버렸다. 그 주기는 점차 짧아져서 언젠가부터 일주일 전에 쓴 일기도 버리기 시작했고, 일기에서 간단한 스케줄러로 갈아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남은 기록이 거의 없는 셈인데, 그래도 용케 살아남은 기록들과 마주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열다섯 살 때 학교 과제로 썼던 글이 갑자기 발견되는 것이다. ‘20년 후의 내 모습’에 대해 쓴 글이었는데, 내 소각 습성과 몇 번의 이사 속에서 그 글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장소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는 열어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중학교 졸업앨범 속에 이 글을 넣어두었던 것이다. 글에 따르면 서른다섯의 나는 독신이고, 작가였다. 실제로는 서른다섯 즈음 나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그 부분을 빼면 글 속의 생활과 거의 일치했다. 대체 열다섯의 나는 어떻게 서른다섯의 내가 원고 마감 독촉을 받을 거란 사실을 예견했단 말인가. 서른다섯의 내가 바나나껍질을 밟고 와장창 넘어지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예측 못한 게 있다면 나보다 먼저 늙어버린 소품이었다. 글에 의하면, 서른다섯의 나는 외출 후 집에 돌아와서 자동응답전화기에 녹음된 메시지를 확인한다. ‘외출 중이오니 용건이 있으면 남겨주세요’라는 메시지가 나오는 자동응답전화기 말이다. 그건 당시 내 동경의 아이템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삐삐(호출기)’가 유행했고, 대학교 때는 휴대전화번호를 갖게 되었다. 결국 자동응답전화기는 내게 한 번도 현재인 적 없이 미래에서 바로 과거로 가버린 셈이다. 어떤 것들은 이렇게 내 몸이 닿기도 전에 삭아버리는데, 묘하게도, 그래서 영원히 꿈의 영역에 남는다.

글=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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