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청사초롱

[청사초롱-손수호] 문재인의 문장

[청사초롱-손수호] 문재인의 문장 기사의 사진
취임식이 한참 지났는데도 여운이 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미 2012년에 한 이야기라고 하는 데, 대통령의 언어가 되니 다르게 들린다. 또 있다.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되어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자랑으로 남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8일 광주에서도 가슴 적시는 기념사를 읽었다. “광주정신으로 희생하며 평생을 살아온 전국의 5.18도 기억해 주십시오.” 5.18의 엄마가 4.16의 엄마에게 보낸 펼침막을 인용한 대목은 짠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월 광주를 글로 풀어내는 일은 늘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대통령 취임사는 대부분 공허한 문장으로 허공에 날아갔다. 단상의 프롬프터를 바라보며 영혼 없는 글을 혼자 낭독하는 데 그쳤다. 누구나 아는 소리, 하나마나 한 소리를 늘어놓고 혼자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도 있었다. 국제정세가 엄중하고 경제가 어렵다, 함께 힘을 모아 희망의 새 시대 열자! 읽는 이는 달라도 내용은 엇비슷했다.

짧게 끊어 치는 글에서 결기 느껴져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문화융성이라는 대등하지 않은 가치를 대등하게 연결해 놓고 다짐했다. “깨끗하고 투명하고 유능한 정부를 반드시 만들어서 국민 여러분의 신뢰를 얻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진화’를 화두로 삼은 뒤 보육시스템이나 탄소배출, 공적개발원조(ODA)와 같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담다보니 엄동설한에 37분간 엄청난 말을 쏟아냈다.

이에 비해 문 대통령은 12분 정도의 간명한 취임사를 읽었다. 뽑아준 국민, 경쟁했던 후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바로 다짐으로 넘어갔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 권위적인 문화를 청산하고, 권력을 나누고, 일자리를 챙기고, 솔직하게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는 신명을 바쳐 일하겠으니 함께 해달라는 부탁으로 마무리했다.

문 대통령의 취임사가 울림을 주는 것은 문장의 힘에서 비롯된다. 예수나 헤밍웨이, 김훈처럼 짧게 끊어 치는 글에서 결기를 느끼게 한다. 귓전에 대고 말하는 듯한 구어체도 전달력을 높였다. 여기에 연설자의 마음을 담으니 공명을 자아내는 것이다. 닳고 닳은 웅변가의 모습이 아니기에 더 믿음이 간다는 사람도 많았다.

맑은 눈으로 시대정신 읽을 때 名文 나올 것

다만 아쉬운 것은 글의 짜임새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다. 큰 가닥과 작은 가닥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아 방점의 위치를 찾기 어려웠다. 짧은 문장이 좋긴 해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문맥이 흐트러지고, 듣는 사람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점수를 매기자면 주제와 표현은 A학점, 구성은 B학점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고스트 라이터의 노출이다. 취임사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작성자가 나타나는 것은 결례다. 스피치는 누가 도움을 주든 연설자의 것이다. 고스트가 커튼 뒤에서 나와 문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된다.

문 대통령이 그동안 쓴 저술을 보면 문학적 소양이 상당하다. 앞으로 빛나는 감성과 맑은 눈으로 시대정신을 읽는다면 멋진 명문을 남길 것이다. 또한 취임사에 담긴 초심을 잊지 않고 실천할 때 국민의 자랑스런 대통령이 될 것으로 믿는다.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