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숙 <3> 11살때 작은오빠와 공산군 피해 산길 걸어 월남

먼저 서울 온 어머니·큰오빠 만나… 자유 찾았지만 가난한 생활 시작

[역경의 열매] 김진숙 <3> 11살때 작은오빠와 공산군 피해 산길 걸어 월남 기사의 사진
큰오빠 김진호(왼쪽)와 작은오빠 김진우. 아버지 같던 큰오빠는 한국전쟁 때 전사했다. 나는 1947년 작은오빠와 함께 철원에서 서울까지 산속을 걸어 월남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함경남도 함주군 선덕면에서 살았다. 아름다운 곳이었고 집안 소유 과수원이 있었다. 해방이 되자 소련 군인들이 과수원에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그들이 올 때마다 나는 올케 언니를 방 안에 숨겨놓고 몇 마디 배운 러시아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소련 군인들은 날계란을 가져와 삶아 달라거나 사과를 달라고 했다. 고작 10살이었지만 나는 올케 언니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겁이 없던 건지 철이 없던 건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와 큰오빠 식구는 공산 치하에서 살 수 없다며 1945년 겨울 월남했다. 어머니와 큰 올케는 해산을 위해 선덕으로 돌아왔다가 46년 8월 조카를 낳고 다시 서울로 내려갔다. 나는 작은오빠와 남아 집을 지켰다. 작은오빠가 일을 나가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다. 어둑어둑해지면 하루 종일 새끼줄로 묶은 나무를 어깨에 메고 내려와 밥을 지었다. 부잣집 막내딸이었다가 직접 일을 하려니 힘이 들었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47년 가을 작은오빠와 난 월남하기로 결심하고 철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빼앗긴 땅을 되찾을지 모른다며 선덕에 남았다. 우리는 무서웠던 아버지를 미련 없이 떠났다. 그게 아버지와 마지막이었다.

철원에서 나와 작은오빠는 삼팔선을 넘으려던 다른 무리와 합류했다. 안내자를 고용하고 공산군을 피해 밤에만 산을 탔다. 아슬아슬하고 무서웠다. 작은오빠 손을 꼭 잡고 잠을 자면서도 걸었다. 며칠 밤을 걸었을까. 우리 일행은 어느 산 속에서 공산군에게 잡혔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방에 갇혔다. 공산군이 남자만 따로 데리고 갈까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제발 우리 오빠 죽이지 말아 주세요. 우리 오빠와 헤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죽음보다 무서운 건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공산군은 어쩐 일인지 우리를 해치지 않았다. 대신 이튿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라며 우리를 돌려 세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척 한참을 걷다 산속으로 빠져 다시 삼팔선을 향해 걸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걷는 고난이 이어졌다. 한 번은 산 속에서 인기척이 나자 오빠와 나만 남고 함께 있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오빠와 난 한참을 깜깜한 숲 속을 헤맸다.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천신만고 끝에 일행을 찾았다. 알고 보니 우리를 놀라게 한 사람들도 월남하던 다른 무리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나선 분들의 심정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됐다.

필사의 노력 끝에 한탄강에 이르렀다. 물이 차가웠다. 발을 담그면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했다. 드디어 자유의 땅에 왔다는 기쁨에 차 추운 강을 한달음에 건넜다. 그리고 또 한참을 걸어 검문소에 도착했다. 미군들은 우리의 머리와 등에 DDT를 뿌렸다. 열한 살짜리가 철원에서 서울까지 밤에 산길로 걷다니.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절박한 세월이었다.

마침내 서울에서 어머니와 큰오빠 내외를 만났지만 또 다른 고난이 시작됐다. 비좁은 집은 말할 수 없이 추웠고 보리밥은 맛이 없었다. 이젠 가난이 내 인생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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