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탐욕과 전쟁하라 기사의 사진
문재인정부의 힘은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통치 철학에서 나온다. 국민이 이 평범한 진리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적폐로 규정되는 ‘앙시앙 레짐’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숨죽이고 있는 구체제’에 대한 순진한 믿음은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나올 법한 권력욕의 화신들을 재등장시키기 쉽다.

흥선대원군의 치적은 1000여개의 서원 철폐다. 서원은 병역 면제 등 적폐 온상지였다. 철폐령에 백성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으나 적폐 세력은 ‘철거 도중 호랑이가 출몰해 사람을 죽였다’는 등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역공했다. 유생들이 광화문 앞에 도끼를 가져다 놓고 자신의 목을 치라며 집단 상소했다. 대원군은 좌우 포도대장을 불러 강력 진압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874년 대원군 실각 이후 만동묘와 화양동서원이 세워지는 등 예전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병인·신미양요라는 ‘이기고도 진’ 전쟁에서 알 수 있듯 우물 안 개구리식 국제 정세 대처가 원인이다.

1884년. 김옥균과 청년 개화당은 청나라가 조선에 신경을 쓰지 못하자 부패한 민씨 권력과 유약한 사대당을 몰아낼 기회를 잡고 우정국 낙성식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들은 일본이 못 미덥긴 했지만 다른 길이 보이지 않자 그 세를 업었다.

이날 조영하 민태호 윤태준 이조연 민영목 등 민씨 권력자들의 목이 달아났다. 개화파를 압박하던 민영익은 이날 자상을 입고 죽기 직전이었으나 홍영식이 친분 때문에 살려줬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였다. 국제 정세, 국내 정치 안목 부족으로 실패했다. 거기에 홍영식과 같은 순진한 믿음의 어리석음, 뼛속까지 양반이었던 김옥균과 그 일파의 계몽적 계급의식도 한몫했다.

개화의 실패는 일제 강점기로 이어졌다. 갑신정변 전까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엘리트 관료 김옥균을 수행했던 ‘강남 좌파’ 윤치호는 정변 실패 후 간신히 개화당이라는 칼끝에서 벗어났다. 강점 후 독립협회장과 기독교 지도자가 되어 애국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독립이 어렵다고 판단, 스스로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다. 윤치호는 “해방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행운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밝혔다. 뉘앙스에 따라 정확한 역사인식일 수도 있고, 정치적 의도를 둔 발언일 수도 있다. 후자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해 10월 15일 윤치호는 ‘한 노인의 명상록’이란 영문 서한을 작성해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보냈다.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은 싫든 좋든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다며 친일파에 대한 사면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도 했다.

그는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1881년 김옥균이 내게 국제무대에 나설 인물이 필요한 때이니 영어를 배우라는 간곡한 권유에 배웠다’고 술회한 바 있다.

10월 20일 그의 두 번째 명상록 요지는 이렇다. ‘친일파 중 유능하고 유용한 이들이 적지 않다. 친일파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자칭 애국자의 공갈 협박에 안전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행위이자 보편적 정의로 일반 사면이 단행되어야 한다. 사소한 개인적 야심과 당파적 음모와 증오심일랑 모두 묻어두고 나라의 공익을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한다.’ 그는 그해 12월 6일 뇌일혈로 죽었다.

모세는 출애굽 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달라는 적폐 세력을 쓸어버렸다.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출 32:27) 죽였다. 타협하지 않았다.

지금은 구약 사회도 아니고, 왕권 사회도 아닌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문재인정부는 증오의 정치 보복을 해선 안 된다. 다만 적폐 세력의 재산 탐욕을 제도적으로 막는 일에 단호해야 한다. 부당한 축적 재산을 숙주 삼은 ‘최순실 시즌2’가 늘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국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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