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숙 <6> 한신대 처음으로 여학생 1등 졸업 영광 안아

경제문제로 美 유학 1년만에 돌아와결혼했지만 생활고는 더 심해져

[역경의 열매] 김진숙  <6> 한신대 처음으로 여학생 1등 졸업 영광 안아 기사의 사진
1959년 한국신학대학 졸업식 때 찍은 사진. 1등 졸업 선물로 웹스터 영한사전을 받았다.
서러운 부산 피란살이 도중 부산 영도에 이화여고가 텐트를 치고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난 이화여중 3학년으로 복귀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몰렸다. 우리 반은 120명이 됐다. 영어를 가르쳤던 이봉국 선생이 얼마나 혹독하게 잘 가르쳤던지 난 잠꼬대까지 영어로 했다. 여든 살이 넘은 내게 조금이나마 영어실력이 남아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때 토대를 잘 닦은 덕분이다.

휴전과 함께 우리 식구는 3년 판자집(하꼬방)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학업과 신앙에 불이 붙었다.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정동교회에서 열리는 채플에 참석했다. 친구 권유로 서울제일교회에 갔다가 성경에 눈을 떴다. 제일교회 이기병 목사는 수요 예배나 새벽기도회 시간에 내게 목회기도를 시켰다. 내 신앙이 부쩍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1954년 겨울에는 제일교회 10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집안 어른들은 법대나 의대 진학을 바랐지만 주님은 100일 기도회 마지막 날 신학 공부를 하라는 비전을 주셨다.

이듬해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에 진학했다. 난 우등생이었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시험을 잘 봤다며 100점 만점에 105점을 준 교수도 있었다. 한 학기에 독일어 시험을 6번 봤는데 600점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는데 세 번 시험에 300점을 받았다. 네 번째 시험은 수술 때문에 나중에 별도로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문 목사는 안 된다며 300점을 4회로 쪼개 평균 75점을 줬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다른 남학생이 1등이고 내가 2등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교무실에 찾아가 성적을 다시 계산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평가 끝에 내가 1등이 됐다. 따져 묻기는 싫었지만 정의를 찾고 싶었다. 개교 이래 여학생 1등 졸업은 처음이라고 했다. 졸업식 날 이름 모를 여성 선교사가 자랑스럽다며 안아줬다. 1등이 어떻게 그리 쉽게 번복됐을까. 노골적인 남녀차별이 빈번했던 당시에 여학생에게 1등을 줘선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한신대 1등 졸업은 내게 큰 의미가 있다. “많이 배워 나처럼 살지 말라”던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1960년 가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시카고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가난한 피란민 출신이었던 내게 이화여고 졸업과 한신대 1등 졸업, 미국 유학시험 합격 등의 기쁜 일이 이어졌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미국 유학 1년 만에 귀국했다. 반드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10년이 걸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의 삶은 힘겨웠다.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법대와 한신대를 졸업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생활력이 없었다.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 두 아들 형수와 용수를 낳고 기르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1년에 한 번씩 사글세를 옮겨 다녔다. 몸이 아파 월급의 절반이 약값으로 들 때가 잦았다. 집세까지 내면 두부와 콩나물로만 살아야 했다. 아이들은 남의 손에 맡겼다. 남편과 세상이 미웠다. 견디다 못해 68년에는 일곱 살짜리 형수를 미국에 사는 애들 고모에게 보냈다. 그러면 미국으로 갈 기회가 올 것으로 믿었다. 나를 위해 자식을 머나먼 곳으로 보내다니 얼마나 모진 어미인가. 보내놓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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