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숙 <8> ‘英語의 바다’로 넣으신 주님… 美 사역 디딤돌 돼

美 수양관서 한국 소개하며 영어 익혀… “자원봉사 끝나면 와달라” 제안 들어와

[역경의 열매] 김진숙 <8> ‘英語의 바다’로 넣으신 주님… 美 사역 디딤돌 돼 기사의 사진
미국 미주리 주 캠프 모발에 있는 연합그리스도교단 수양관 앞에서 첫째 아들 형수와 함께 찍은 사진.
독일과 일본, 한국, 미국 등에서 필라델피아로 모인 자원봉사자는 나를 포함해 열한 명이었다. 우리는 한 달 간 저소득층 지역과 흑인 빈민촌, 고아원 등을 방문하며 교육을 받았다. 자원봉사자들은 열정적이었다.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를 다녀온 뒤 인종차별 문제에 관한 질문으로 밤새 지도목사를 괴롭히기도 했다. 주요 논제는 ‘미국 같은 기독교 국가에서 왜 백인과 흑인이 교회를 따로 나눠 다니느냐’는 것이었다. 백인 지도목사는 인종차별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도 어둠이 있음을 절감했다.

교육을 마치고 미주리주의 연합그리스도교단 수양관에 배치됐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유니온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다시 9마일 정도 떨어진 시골이었다. 형수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수양관 책임자인 레이먼드 바이저 목사와 엠마 루 사모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엠마 루 사모는 목사 부인회 모임 등에 나를 데려가 소개했다. 주일에는 나와 형수를 자신의 교회로 데려갔다. 바이저 목사는 간장과 고춧가루를 구해다 주었다. 난 햄버거에도 간장과 고춧가루를 뿌려 먹었다.

수양관에서 한복을 입고 모든 교회 그룹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일을 맡았다. 매달 용돈으로 20달러만 받고 일했다. 당시엔 영어가 유창하지 못했다. 대중 앞에 서서 한국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몸으로 부딪히며 익혔다. 한국 기독교나 6·25전쟁 등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오면 더듬더듬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 외 시간에는 부엌에서 요리하고 설거지를 도왔다.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속옷까지 젖도록 청소를 했다. 내 일은 아니지만 기왕 봉사할 바엔 제대로 하고 싶었다. 매일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 그리고 그 일을 자세히 적은 보고서를 매달 교단본부로 보냈다. 본부에서는 내 보고서를 영화 보듯 즐겁게 읽었다고 한다.

내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교단의 다른 곳에서 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해에만 100여회 강연을 다녔다. 그러다보니 영어가 트였다. 하나님이 나를 영어의 바다로 밀어 넣으셨다고 믿었다. 영어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환경이었고 그게 미국에서 살아남는 첫 걸음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문법과 10년 전 미국 유학생활이 큰 도움이 됐다. 언어 훈련은 훗날 내가 미국 전역의 500여 개 교회를 다니며 설교하는 디딤돌이 됐다. 미리 나를 훈련시킨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감탄할 뿐이다.

자원봉사를 시작한 지 5개월, 미국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맞았다. 은퇴자들의 요양시설인 ‘굿 사마리탄 홈’이라는 곳에서 날 초청했다. 추수감사 전날 노인들에게 강연을 하고 감사절 아침 예배에서 설교해달라고 했다. 내가 했던 설교가 기억에 남는다.

“추수 감사란 무엇인가. 칠면조 고기 먹고 휠체어 타고 따뜻한 시설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인가. 우리나라엔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노인이나 고아, 과부들이 너무나 많다. 그렇게 아픈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추수 감사는 어떤 의미이겠는가”라고 열변을 토했다. 설교가 끝나자 시설 책임자가 나를 불렀다. 그는 내게 6개월 뒤 자원봉사가 끝나면 자기 시설에 와서 일해주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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