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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진숙 <9> 美서 보조 복지사로 첫발… 직장·집 한번에 해결

기쁨도 잠시… 남편과 아이에 주변서 불평… 신경쇠약 걸려 울음 멈추지 않아 입원

[역경의 열매] 김진숙 <9> 美서 보조 복지사로 첫발… 직장·집 한번에 해결 기사의 사진
우리 가족은 1973년 미국에 첫 집을 마련한 뒤 뉴올리언스로 여행을 갔다. 왼쪽부터 나와 둘째 아들 용수, 남편, 첫째 아들 형수다.
1971년 5월 자원봉사 기간이 끝나자 곧장 ‘굿 사마리탄 홈’으로 갔다. 미시시피 강 언덕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곳에서 내게 침실 두 개에 가구가 딸린 직원 아파트를 제공했다. 아침과 점심은 물론 월급으로 200달러를 줬다. 따로 직장을 알아보지 않았는 데도 이런 행운이 찾아왔다. 외국인 여성인데 직장과 집과 월급이 한꺼번에 해결되다니. 1년을 강행군으로 언어 훈련을 시킨 주님께서 직접 알선하신 것으로 여겼다.

그곳에서 보조 복지사로 일했다. 시설의 6층은 병원 겸 양로원이었는데 이곳에 입원한 노인들의 자활 프로그램을 도맡았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노래도 하고 간단한 것들을 만들거나 게임을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상담도 했다. 이런 프로그램을 ‘놀이치료’라고 불렀는데 당시엔 생소했다.

노인들은 젊었을 때 내로라하는 직업과 경력을 자랑하던 쟁쟁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늙고 병드니 남은 것은 고독뿐이었다. 외로운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친절하게 대했다. 사랑을 베풀었다.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함께했다. 하나님은 수양관에서 내게 언어 연습을 시키시더니 사마리탄 홈에서는 황혼 길을 걷는 늙고 외로운 노인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시키셨다.

사마리탄 홈에서 일한 지 1년 5개월째 되던 72년 10월 나는 고국에 남은 남편과 둘째 아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사마리탄 홈의 책임자 목사님은 나를 귀하게 여겼다. 내게 영주권을 주기 위해 서류를 준비했다. 게다가 내 남편이 미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활프로그램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내가 당사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느냐고 말했지만 목사님은 “그 아내에 그 남편 아니겠느냐”며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했다. 식구들이 미국으로 왔을 때 내게는 이미 집과 차가 있었다. 남편의 직업까지 준비돼 있었다. 아이들은 곧바로 학교에 다녔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고서야 이런 축복이 가능했을까. 내 인생은 이렇게 중요한 고비마다 주님의 은총으로 가득하다.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남편은 미국에 오자마자 운전을 배운다며 차를 끌고 나갔다가 나무를 들이받았다. 직장에서는 한국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한다며 간호사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수간호사는 남편이 간호사들에게 잘 협조하지 않는다며 나를 수시로 불러댔다. 장난이 심한 아이들이 집안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밖에서 뛰어다니는 것이 그곳 노인들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불평이 쏟아졌다.

가슴앓이를 했다. 낮에 일하고 밤새 끙끙 앓고 다시 아침에 출근하는 일이 반복됐다. 어느 날 저녁 속이 너무 상해 아파트 앞을 흐르는 미시시피 강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떠났던 조국이 그리웠다. 울고 또 울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남편이 나를 병원 응급실로 데려 갔다. 병원에서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주사를 맞고 입원했다.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다. 울 일은 있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 울음을 그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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