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내렴의 성화 묵상] 위선자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위선자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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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죄로 잡혀온 여인(1917년 작), 막스 베크만(1884~1950), 캔버스에 유화, 149.2×126.7㎝, 미국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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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깨끗한 척하며 남을 헐뜯고 매도하는 이들이 있다. 상대편을 끌어내리기 위해 자기를 속이며 타인에게는 가혹하다. 이럴 때 어울리는 우리말 속담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숯이 검정 나무란다’ ‘제 흉 열 가지 가진 놈이 남의 흉 한 가지를 본다’…. 요즘에는 이렇게도 쓰는 모양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신약성경(요 8:1∼11)은 “예수를 시험해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을 지닌 당시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그럴싸한 근거를 들어 곤란한 문제를 가지고 나온다. 어떤 답을 해도 올무에 걸리게 할 생각이다. 하지만 예수는 결코 동요하지 않고 되레 저들을 무안하게 만든다. 질 낮은 속셈을 무위에 그치게 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을 향할 무렵 독일 화가 막스 베크만은 참전경험을 바탕으로 양식상의 변화를 보인다. 전쟁 중 실존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찼을 그는 이전과는 달리 인간의 모습을 아름답게만 그릴 수 없었을 듯하다. 탐욕과 허위의식에 찌든 군상들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까닭은 그래서일 것이다. 허나 그의 종교적 주제들은 거친 표현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생각케 한다. 베크만의 그림은 이제껏 우리 눈에 익은 비례나 사실적 묘사와는 다르다. 이 그림엔 일점투시원근법을 벗어난 다(多)시점이 나타난다. 위에서 바라보기와 아래에서 바라보기가 공존한다. 현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 아닌 ‘다층적 사고’속에서 분석해야 함을 일깨운다.

눈여겨 볼 점은 그림 속 수많은 손짓들이다. 우선 혐오와 공격을 나타내는 주먹 쥔 손들, 경멸과 비난을 드러내는 집게손가락들이 눈에 띈다. 반면 그리스도의 두 손은 증오를 진정시키고 삶을 지원한다. 똑바로 세운 왼손을 통해 여인에 대한 다른 이들의 공격을 막아낸다. 오른손으로는 연민을 드러내며 포용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리스도는 단호한 자세로 다른 이들보다 크게 묘사된다. 상황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며, 적의를 품은 옹졸한 사람들을 크기에서 압도한다. 사람들의 의도를 간파한 예수는 덫에 빠지지 않고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성경엔 그분이 땅에 뭔가를 적고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기록돼 있다. 무엇을 적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으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들 각자의 죄목을’ 썼다는 주석도 있다. 자신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었을까. 손에 들었던 돌멩이는 땅바닥에 힘없이 뒹군다. 간음한 여인의 두 손은 회개와 감사의 기도로 모아진다. 부감 시점으로 표현된 여인은 무릎을 꿇어 작고 낮아진 모습이지만, 그리스도의 적극적 옹호로 하류인간 수준으로 축소되진 않는다.

그림 속에서 예수는 죄인을 용서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다. 내밀한 관계맺음은 사적 친분관계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과 관련 있음을 보여 준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 8:11) 이전의 시간보다 이후의 시간으로 자신을 평가하게 해야 할 것이다. 타인에 대해선 관대하고 자신에 대해선 엄격할 것,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여야 한다. 항상 성경은 독단과 비난의 화살을 거둬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마 7:5)

<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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