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숙 <11> 맏아들 사고로 잃고 매일 통곡하며 1년여 방황

무덤서 울고 있을 때 “왜 우느냐…” 하나님께 ‘항복’하고 시애틀로

[역경의 열매] 김진숙 <11> 맏아들 사고로 잃고 매일 통곡하며 1년여 방황 기사의 사진
11학년이 된 형수와 함께 고등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왼쪽). 난 형수가 숨진 뒤 무덤 위에 꽃을 심고 매일 물을 주며 울었다.
맏이 형수는 공부를 잘했다. 학교에서 별명이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형수는 1976년 8학년(중학교) 졸업할 때 백인 학교에서 1등을 했다. 학교에서는 동양인에게 1등상을 주기 싫었는지 모의고사를 두 번이나 봤다. 형수가 두 번 모두 1등을 하고 1등상을 받았다. 교장은 전통에 따라 형수를 오픈카에 태워 동네를 돌았다. 형수는 운동도 잘 해 각종 대회에 출전해 트로피를 수두룩하게 받아왔다.

아이가 잘 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78년 4월 30일 형수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잘 살아 보려고 미국으로 왔는데 소중한 아이가 한순간 내 품을 떠났다. 내 삶이 완전히 무너졌다. 자식 잃은 어미 심정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아들을 영원히 놓친 아픔과 허탈감, 무력감, 절망감을 어디에 비할까. 혼이 완전히 나갔다.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8년여 동안은 봄이 오는지 가는지, 꽃이 피는지 지는지 쳐다볼 새도 없이 정신없이 뛰었다. 그렇게 허둥대다 그제야 안정을 찾게 되나 싶었는데 암흑 세상이 됐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세 살 때 물에 한동안 빠졌다 둥실 떠올랐다던데 그때 왜 영원히 가라앉지 않았을까. 초등학생 때 말라리아를 여러 번 앓았는데 왜 그때 죽지 못했을까. 한국전쟁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난 왜 함께 죽지 못했을까.

매일 형수 무덤 앞에서 통곡했다. 제발 날 죽여 달라고 하나님과 씨름했다. “저는 여자도, 어미도, 인간도 아니고 죽을 자격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제발 저를 벌하시고, 놓으시고, 버리시고, 불쌍히 여기지도, 위로도 하지 마옵소서. 아들 무덤 옆의 땅이 쫙 갈라져 저를 삼키게 하소서”라고 울부짖었다. 형수와 함께 갔던 햄버거 가게를 찾아갔고, 함께 운동했던 공원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다니던 학교, 동네, 집, 방 등이 모두 눈물이었다. 내 몸의 모든 뼈와 살과 영혼이 부서지고 내려앉을 때까지 하나님을 밀어냈다.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들렸다. 누가 목을 조르는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찬송가를 펴고 첫 장부터 끝 장까지 통곡하며 불렀다. 찬송가 한 권을 다 불러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을 넘게 방황했다.

어느 날 저녁 형수 무덤에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어깨에 다른 사람의 손길이 느껴져 얼굴을 들어보니 어떤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그도 울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내게 “왜 우느냐”고 물었다. 난 “아이를 여기에 묻었다”고 대답했다. 그에게 “당신은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아들 옆의 무덤을 가리키며 “나는 여기에 내 아버지를 묻었고 내게도 그만한 나이의 아들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날 내 어깨에 닿은 손길은 따뜻했다. 그가 흘린 눈물은 주님의 눈물로 여겨졌다. 나와 함께 울어주시는 주님의 얼굴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위로가 됐다. 결국 난 “하나님께서 이기셨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하시라”고 말하고 항복했다. 하나님은 끝까지 날 꽉 껴안고 놓지 않으셨다. 형수를 가슴보다 더 깊은 곳, 내 영혼의 저편에 묻었다. 그리고 제2의 고향인 세인트루이스를 떠났다. 마치 죽음에서 부활을 소망하듯 우리 가족은 79년 7월 시애틀로 향했다.

정리=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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