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강창욱] 누구를 위해 사랑을 주장하나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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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내리던 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첫눈 내리는 순간에 가장 먼저 네가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이 싱그러운 첫눈을 맞으면서도 보고 싶은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마음을 거두기로 했다. 그 애매한 관계에서. 정지선 앞에 멈춰 선 듯 더는 다가가지 않은 채로 주변을 기웃거리듯 어정쩡하게 굴던 마음을. 조금만 더 애를 쓰면 이 미완의 문장 뒤로 마침내 뭔가 쓰일 것 같아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 며칠을 붙들고 있던 글을 비로소 포기하고 노트에서 북 뜯어내 휴지통에 밀어 넣듯이.

하루에도 십수 통씩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웃고 떠들던 관계를 ‘첫눈 내리는 날’ 정리하자고 결심하다니. 서글프기도 했다. 사랑을 이뤄주기도, 만들어내기도 하는 마법 같은 첫눈을 맞으며 나는 내 관계가 사랑도,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님을 확인하고는 ‘이것은 사랑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접은 것이었다.

그 후 불쑥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었다. 성급했던 건 아닐까. 공유하는 경험과 교류하는 감정이 더 쌓이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국면에 접어들게 되지 않았을까. 사랑이 그리 대단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분명히 안다. 사랑이 그리 대단한 것이든 아니든 그 관계가 연애라는 표제를 붙이기에는 너무나 탄력 없는 것이었고, 첫눈 내리던 날의 결론도 충분히 우물쭈물한 뒤에 내린 것이었음을.

애매하던 것들, 애매한 채로 둔 것들이 선뜻 분명해지는 때가 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뜸을 들이거나 짐짓 오기를 부렸던 일들.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미련으로 놓지 못하던 일들. 이런 것들이 서술형 수학 문제 답안 앞에서 가차 없이 오답으로 확인되듯 자명해지는 때 말이다. 계산이 처음부터 엉터리인 경우도 있고, 전개 과정에서 덧셈뺄셈을 틀리거나 숫자 하나 잘못 적는 수준의 실수로 그 뒤가 엉망이 돼버린 경우도 있다. 처음부터 엉터리였다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쉽다. 아는 문제, 안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틀렸을 때는 좀처럼 수긍이 안 된다. ‘그저 실수’라고 치부할 뿐. 한 번 틀린 문제를 기어이 또 틀리게 되는 건 그 고집스러운 안이함 때문일 것이다.

상대에게나 나에게나 애매한 관계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나 나름대로 ‘썸’이라는 시쳇말을 정의하게 됐다. 적어도 한쪽이 상대에게 호감을 가진 순간부터 서로 사귀자고 합의하기까지의 모든 과정. “사귀기로 한 게 아니라면 남녀 사이에 무슨 짓을 했더라도 그건 다 썸”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 있는데, 이보다 쉬운 풀이도 없다.

호감 없는 관계는 썸이 되지 않는다. 이건 분명하지만 호감을 갖는다고 그게 곧 연애를 하고 싶다는 말인 건 아니다. 대개는 호감을 내비치며 다가와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볼 기회를 만들고, 안심과 만족이 될 때에야 연애를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호감 이후 연애에 이르기까지 탐색이라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남녀 관계라는 거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다. 그래도 이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왜 그렇게 친밀하게 다가왔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물러가는지를.

그러나 썸을 정의한다고 애매한 것들이 분명해지지는 않았다. 애매한 감정과 애매한 관계는 어떻게든 직접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었다. “우리 이제부터 사귀어요”라고 선언한 관계라고 애매함이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상황을 바꿔가며 계속되는 애매함 때문에 머뭇거리고, 끙끙대고, 토라지고, 싸우고, 헤어진다.

사랑은 사람을 고집스럽게 만든다. 적당한 때 미련을 잘라내지 못하면 오기로 변하고, 진심과 가심(假心)이 뒤섞이고,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지경이 된다. 상대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의 성취욕이나 승부욕에 불타고, 그게 달성되지 않아 상대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 사랑이 허상이나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 그토록 요란해지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믿었던 것만큼이나 사랑했던 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세간의 확증편향 사례가 이상할 것도 없다. 사랑이라는 게 본래 신념의 한 형태일 게다. 그렇다면 내가 속박한 것은 ‘너’나 ‘너와의 관계’가 아니라 ‘나 자신’일 테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게 되는 순간에는 인정하지 못한다. 그게 우리 문제다.

글=강창욱 산업부 기자 kcw@kmib.co.kr,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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