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를 함께 담은 거대한 화채그릇 기사의 사진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해안분지 전경. 해발 1100m를 넘는 험준한 산봉우리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움푹 파인 듯한 곳에 ‘펀치볼 마을’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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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가칠봉(加七峰·1242m) 능선에 자리잡은 을지전망대(1049m)에 오르면 두 단어가 교차한다. 이 주변은 6·25전쟁 때 가칠봉 전투, 도솔산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이 치러진 격전지였다.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경기도 파주·연천과 강원도 철원과 화천을 거쳐 양구까지 온 비무장지대(DMZ)에 깊은 정적만이 흐르고 있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험준한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한 해안분지(亥安盆地)가 오래전 떠난 고향처럼 포근하게 펼쳐져 있다. 아픈 역사가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현충일과 6·25가 들어 있는 호국보훈의 달에 전쟁의 시간과 평화의 시간이 공존하는 양구로 떠나자.

전쟁의 상흔 위에 피어난 청정자연, 해안분지

을지전망대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높은 봉우리가 두 개 보인다. DMZ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남측 가칠봉과 북측 스탈린 고지(1210m)다. 가칠봉은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로 이곳을 더해야 1만2000봉이 된다는 뜻에서 ‘더할 가(加)’를 썼다고 한다. 이 산 바로 아래에 북한이 판 높이와 폭이 1.7m, 길이가 2052m인 제4땅굴이 있다.

동부전선의 가칠봉 전투는 1951년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40일 동안 계속됐다. 전략요충지였기에 낮에 백병전으로 어렵게 점령한 고지를 밤에 빼앗기기를 여섯 번이나 반복했다. 고지 하나를 두고 국군 제5사단과 북한군 제27사단이 맞붙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1102명이 사살되고 250명이 포로로 잡혔다. 우리 측 피해도 커서 692명이 죽고 437명이 실종됐다. 부상자는 4251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북한군을 쌍두령 쪽으로 밀어내고 펀치볼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가칠봉에서 스탈린 고지를 지나 매봉(1290m), 운봉(1358m), 박달봉(1136m), 간무봉(1163m) 등 고산준령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매봉과 운봉 사이로 높이 21m에 달하는 선녀폭포가 하얗게 실오라기를 풀어놓고 있다. 폭포는 성내천으로 흘러 내려 인제의 인북천과 만나 평화의 댐을 거쳐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박달봉과 간무봉 사이로 38㎞ 정도 떨어진 금강산(1638m)의 일부 봉우리가 걸개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가칠봉에서 전망대쪽으로 시선을 내리면 DMZ내에 우리측 초소와 북한측 초소가 나란히 보인다. 거리가 780m에 불과할 정도로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이 지상에서 가장 멀게 느껴진다. 남과 북,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은 덕분에 ‘금단의 땅’ DMZ는 야생동물과 원시림의 보고가 됐다. 안보의 상징인 철책이 걷혀 평화의 상징이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해본다.

고개를 남쪽으로 돌리면 해안면이다. 분지 하나가 1개 면을 이루고 있다. 해안은 먼 옛날 지명에 ‘바다 해(海)’ 자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해안분지에는 주민이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뱀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 이 지역에서 돼지를 키우면서부터 뱀에 의한 피해가 사라졌다고 해 이름을 ‘돼지 해(亥)’로 고쳤다고 한다.

해안면의 풍광은 독특하다. 가칠봉·대우산(1179m)·대암산(1304m) 등 해발 1100m를 넘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거인이 커다란 숟가락으로 푹 파낸 듯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암석의 차별풍화와 침식에 의해 형성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폐쇄형 분지이다. 남북 11.95㎞, 동서 6.6㎞에 둘레는 무려 33㎞에 이른다. 면적은 44.7㎢로 여의도의 6배가 넘는다. 해발고도는 400∼500m. 분지 안에는 펀치볼 마을(해안면 만대리·현리·오유리)이 자리하고 있다. 생성 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엇갈린다. 거대한 별똥이 떨어져 만들어진 운석 구덩이라는 주장은 흥미롭긴 하지만 학계에서는 편마암과 화강암 간의 차별적 풍화작용에 의해 생겨났다는 설이 우세하다. 거대한 호수의 물이 빠진 듯한 모습이다. 화채그릇의 안쪽은 산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계단식 밭을 이루고 있고,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와우산 구릉 너머로 농가들이 정겹게 처마를 맞대고 있다.

6·25전쟁 당시 외국인 종군기자는 이를 보고 ‘펀치볼(Punch Bowl)’이란 이름을 붙였다.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마치 화채그릇처럼 보였기 때문이란다. 펀치볼은 폭격과 전투로 철저히 파괴됐다. 한국 해병대 제1연대와 미 해병대 제1사단은 북한군 1사단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확보했다. 휴전 후 1956년 난민정착사업의 일환인 재건촌 조성으로 100가구씩 입주시키며 마을의 틀이 만들어졌다. 이주민들은 외부와의 통행 통제를 받으면서 먹고살려고 지뢰가 가득한 땅을 일궈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피로 물든 전투마다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곳곳에 세워진 전적비들은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6월이 되면 이곳에서는 승전을 기념하는 ‘작은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다. 오는 17일 개최되는 ‘2017 도솔산지구전투 전승행사’다.

통일 염원하는 한반도 모양 물길, 두타연

두타연에 처음 발길을 들여놓으면 섬뜩함이 다가온다. 전쟁의 상흔이 남긴 빨간색 ‘지뢰’ 표지판 때문이다. 소리 없는 경고에 가슴이 떨리지만 재잘대는 산새들과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는 적막감을 깨운다.

두타연 탐방을 위해서는 출입신고서를 작성하고 받은 위치추적목걸이를 착용한다. 비포장 도로를 달려 주차장에 도착한 뒤 걸어서 10여m를 내려서자 폭포소리가 세차다.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수입천의 맑은 냇물이 병풍을 두른 듯한 20m 높이의 바위를 휘돌아 떨어지는 모습이 장쾌하다. 폭포수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소(沼)는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감돌고 있다.

폭포 아래쪽으로 탐방로에 들어서면 길 양쪽에 전쟁의 상흔이 남긴 역삼각형 붉은색 ‘지뢰’ 표지판이 보인다. 6·25전쟁 당시 뿌려진 지뢰들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곧 이어 지뢰체험장이 나온다. 인근에는 구멍 뚫린 녹슨 철모가 분단의 현장을 대변해준다.

수입천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두타교)를 건너면 소를 끼고 수입천 상류로 탐방로가 이어진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시 내려오면 전망대에 도착한다. 폭포와 소가 발아래 있다. 3단 바윗골을 따라 쏟아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바위 사이의 물길은 통일을 염원하듯 한반도 지도를 그린다. 67년 전 천지를 진동하던 포탄소리의 아픔이 두타연 비경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 여행메모
을지전망대·두타연 출입에 신분증 필요
양구 특산물 시래기로 만든 맛깔난 음식


수도권에서 승용차를 이용할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춘천에서 46번국도로 갈아탄 뒤 양구 방향으로 가면 된다. 대중교통은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양구시외버스터미널까지 하루 31회 운행한다. 1시간 40분 이상 소요된다. 양구터미널에서 해안면까지 하루 4차례 버스가 오간다.

을지전망대는 양구의 비무장지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다. 날씨가 좋으면 해안면 일대 화채 그릇 모양의 ‘펀치볼’이 황홀하게 펼쳐진다. 양구통일관(033-480-2674)에서 입장료(3000원)를 내고 출입신고서만 작성하면 승용차로 을지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입장료에는 제4땅굴 관람료도 포함돼 있다.

양구 ‘제1경’ 두타연은 이목정안내소(033-482-8449)로 가는 게 좋다. 출입신고서를 작성하고 입장료(3000원)를 내면 승용차로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비득안내소(033-482-9229)로 가면 왕복 5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민간인통제선 안에 위치한 을지전망대와 두타연 입장은 여름철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능하다. 두 곳 모두 신분증이 필요하고, 월요일은 휴무다.

이밖에 남면 도촌리의 정중앙천문대(033-480-2586)는 전시실과 관측실을 갖추고 있다. 산양증식복원센터(033-480-2665)에선 복원 중인 산양을 만날 수 있다. 정림리 박수근미술관(033-480-2655)에서는 양구 출신 화가 박수근의 일생을 엿볼 수 있다.

양구는 시래기 생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펀치볼 시래기는 해발 600m 고랭지에서 키운 시래기 전용 무로 만들어 잎이 많고 뿌리가 작으며 추운 날씨에 두 달간 자연 건조해 맛이 좋다. 남면의 시래원(033-481-4200)은 시래기정식을 맛깔나게 내놓는다. 광치막국수(033-481-4095), 도촌막국수(033-481-4627) 등도 맛집이다.

양구=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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