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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김혜림] 공정한 과정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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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년 전 이맘때다. 노무현정부 시절 모 대기업 홍보팀장과의 식사자리였다. 그는 “이제 1년 남았습니다. 8개월만 버티면…”이라고 말했다. 차기 대통령은 보수 진영에서 나올 것이고, 그러면 기업들이 일하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소망은 이뤄졌다. 그해 12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17대 대통령으로 뽑혔다. ‘기업 프렌들리’ 정책을 강조했던 MB정부 말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는 ○이 더 무섭다는 옛말 그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 전 대통령의 한마디에 기업들은 알아서 기어야 했다. 18대 박근혜 대통령도 총수들과의 밀실 대화를 통해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고 하니 기업들이 일하기 좋은 세상은 결코 아니었다.

대기업 임원이 돼 있는 그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임명된 날 다시 만났다. 그는 “지내놓고 보니 이것저것 요구하는 보수 정권보다 원칙만 지키면 일할 수 있었던 노무현정부가 더 좋았던 거 같다”면서도 얼굴에는 초초한 빛이 역력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삼성 등 4대 재벌 개혁을 주장했다. 잘못한 재벌 총수들의 중대 범죄에 대해선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는 ‘무관용 원칙’도 강조했다. 그 소신은 ‘재별 저격수’로 불리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 공정위원장 임명으로 손발을 얻었다.

실은 그날 기자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청와대는 “흠결보다 정책적인 역량을 높게 평가하는 국민 눈높이에서 김 위원장은 이미 검증을 통과했다”면서 여론을 앞세워 국회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을 강행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지는 않다.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쪽박에 금이 가는 일을 해선 안 된다.

문 대통령 취임사를 들으면서 가슴이 방망이질한 기억이 새롭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다. ‘이게 나라냐’고 울분을 토하게 했던 지난 정부의 과오를 바로잡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역사’를 하기에 5년은 길지 않다. 하지만 정의로운 결과는 공정한 과정이 뒷받침됐을 때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가 경영의 큰 틀에서 시작하겠다는 저출산 정책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 8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국정 3대 우선 과제’로 일자리·4차 산업혁명·저출산 대책을 선정,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김진표 국정기획위원장은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낳아서 잘 키울 수 있도록 여성의 일과 가정 양립정책을 현장의 다양한 수요에 맞춰서 다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정부들이 100조원을 투자해 10년간 공들인 저출산 극복의 핵심 정책이 바로 여성의 일과 가정 양립이었다. 이 정책은 여성들이 ‘경력 단절’이라는 웅덩이를 건너뛰는 데는 도움이 됐다. ‘퍼플잡’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참 ‘나쁜 일자리’(비정규직)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엄마가 돼도 일할 수 있게 해줬으니 출산율은 올라갔을까.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6년 1.12명이던 합계출산율이 2016년 1.17명으로 눈곱만큼 늘었을 뿐이다. 신생아 숫자는 44만8000명에서 40만6000명으로 외려 줄었다. 올해는 30만명대로 더 줄 것으로 예상된다. 21세기는 여성 혼자 뒤집어쓰는 ‘독박 출산’과 ‘독박 육아’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슈퍼 우먼의 시대가 아니다. 그건 20세기 여성들의 눈물겨운 스토리로, 국립여성사전시관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일·가정 양립 정책은 남성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출산 절벽’ 탈출구를 찾기 위해선 산전·후 휴가제를 제외한 육아휴직제, 유연탄력근무제, 시간선택제 등을 여성이 아닌 남성 근로자가 쓰게 해야 한다. 앞선 정부들의 성공하지 못한 정책을 되풀이해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의 열정은 실현되기 어렵다.

김혜림 논설위원 겸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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