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23명 희생 시킨 ‘思想의 칼’… 선교 도구로 벼리다

정읍 두암교회와 故 김용은 목사

[한국기독역사여행] 23명 희생 시킨 ‘思想의 칼’… 선교 도구로 벼리다 기사의 사진
김용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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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서울신학교(현 서울신대)를 졸업한 김용은(1918∼2009)은 충남 공주교회로 부임할 예정이었다. 그해 4월 1일 김용은을 비롯한 신학생 전원은 그의 주도로 40일 특별기도회를 가졌다. 하나님의 병사가 되고자 다짐하는 뜨거운 기도회였다.

김용은은 부임 준비를 위해 전북 정읍의 집으로 향했다. 가족과 교회 식구들이 늘 따뜻하게 맞아주는 삶의 뿌리이자 '신앙의 샘' 정읍 두암마을이었다.

그러나 김용은은 부임조차 하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모든 게 혼돈으로 빠졌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죄를 스스럼없이 저지른 대가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김용은은 일제치하에서 고향을 떠나 일본, 만주, 함흥 등을 돌며 연단의 삶을 살아왔다. 전능자의 화살이 박힌 욥과 같이 고난의 길을 걸었다.

7월이 되자 인민군이 정읍을 점령했다. 자생 좌익들이 설쳐대기 시작했다.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정치보위부 완장을 찬 '좌익 이웃'들이 지주와 자본가를 지목했다. 서양 귀신을 섬기는 교회는 그들에게 청산 대상이었다. 예배드리는 것조차 위태로웠다.

좌익 이웃, 교회를 지목하다 지난 주일 정읍시 소성면 보애길 두암교회. 사람들은 신주소로 부르지 않고 애당리 두암교회라 칭했다. 두암예배당 본당 입구에서 바라본 들판은 6월의 모가 연두색 물결이었다.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6·25 발발 무렵도 이랬을 것이다. 두암교회는 49년 1월 신학생 김용은이 개척했다. 고향 두암마을에 교회가 없어 4㎞ 떨어진 곳까지 걸어다녀야 했던 어머니와 마을 교인을 안타까워하던 그는 '아버지의 집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 개척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신문사 지국을 운영할 만큼 수완이 좋았다. 돈은 개척 예배당 헌당에 썼다. 그리고 방학 때면 두암교회로 내려와 전도에 힘썼다.

김용은은 전쟁 직후 두암예배당에서 철야기도를 하며 교회를 지켰다. 전세가 인민군에 기울면서 공산주의에 물든 소작농들이 들고 일어나 설쳤다. 친인척, 동네 어른 등 한때 다정했던 공동체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그들 손끝에 지목된 이들은 악질 반동으로 몰렸다. 교회 또한 사상적 반동으로 인민의 적이었다.

지주 처형이 잇따랐고 사상 반동분자가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 마을마다 극도의 공포가 짓눌렀다. 살기 위해 협조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자신들이 살기 위해 교회와 교인을 반동으로 지목했다.

9월 하순. 두암마을에도 낫과 칼로 무장한 좌익분자 30여명이 들이닥쳤다.

"목사 ××, 어딨어? 끌어내 죽여버려!"

김용은은 독 안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그날 밤 공동묘지를 지나 인근 동네로 피신했다. 논고랑과 대숲이 은신처였다. 앞서 그해 7월 김용은은 정치보위부에 끌려갔었다. 인민위원회는 그를 서울에서 공부한 악질 인텔리로 보고 사상적 전향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용은은 "같은 마을 사람을 처형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당신 목숨이나 잘 간수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김용은이 일제강점기 흥남에서 알루미늄 공장을 하며 돈을 벌어 고향 마을에 기와집을 지은 것과 고향에 돌아와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성토하는 시국강연을 하고 다닌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밀고가 아니면 그들이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마음 아파했던 건 예배당 폐쇄였다. 정치보위부에 출석한 그가 "당신네들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지 않았소"라고 따졌지만 "지금은 전시기 때문에 당분간 중단한다"고 변명했다.

9·28서울수복 후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과 빨치산은 더욱 잔학해졌다. 밤이면 산에서 내려와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부녀자와 아이, 노인을 제외하면 집에서 잘 수가 없었다. 김용은도 대나무 숲에 굴을 파고 은신했다. 마치 차범석 희곡 '산불'의 전직 교사 규복과 같은 생존투쟁이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마을을 떠나 피신하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성경에도 뱀처럼 지혜로우라' 하시지 않았냐며 애원하셨죠. 하지만 가족을 그들 손에 놔두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갈 순 없었어요. 더구나 동생 용채에게 깨다리라는 다리 밑에서 총을 쐈어요. 용채는 총알이 목을 관통했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았어요. 제가 자전거에 피 흘리는 동생을 싣고 마을을 탈출했어요." 동생 총살 사건 후 그는 정읍 시내로 들어가 치안대를 조직했다. 치안대는 뽕나무 밭에 숨어 저항했다. 빨치산들이 낮이면 방장산 등 노령산맥 줄기에 숨어 있다 밤에 시골마을로 내려와 보급투쟁을 벌였다. 그들이 쏘아대는 아카보 장총 소리가 딱꽁딱콩 요란했다.

밤과 낮으로 공화국이 바뀌면서 정읍의 우익인사 30여명이 죽었다. 우익의 보복도 이어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동생 용채는 끝내 저들에게 잡혀 희생됐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전하는 목사로 하여금 손에 총을 들게 하는 세상, 그런 세상이야말로 종말이다." 훗날 김용은은 이렇게 회고했다.

목사가 총 잡아야 하는 '종말'

주일 오후. 두암교회 홍용휘 목사가 예배당 옆 합장 순교자 묘지와 추모탑 앞에서 낫과 칼을 갈고 있었다. 이날 오전 예배 때 홍 목사는 '칼갈이 봉사' 광고를 했다.

"이웃을 섬기는 칼갈이 무료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칼이나 낫, 가위 등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제게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애당리 구역을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두암교회는 최근 칼갈이 전동기계를 구입했다. 고령화된 농촌 사람들은 이제 칼갈이조차 쉽지 않을 만큼 쇠했다. 홍 목사와 제직이 이들을 위해 교회 예산으로 칼갈이 기계를 구입, 주민을 대상으로 봉사에 나서자 폭발적인 호응이 이어졌다.

홍 목사가 갈아준 낫의 성능 시험을 위해 순교자추모탑 앞 나무 잎사귀를 베자 우수수 땅 위로 떨어졌다.

1950년 10월 중순 전후. 애당리 주민과 교인 23명의 무고한 목숨이 좌익의 낫과 칼, 죽창 그리고 총탄에 쓰러졌다. 김용은(당시 전도사)의 어머니 윤임례, 아들 성곤, 제수 조선환 집사, 조카 무곤 의곤 순곤 길곤 택곤 우곤 오곤, 재당숙 정두 환두, 재당숙모 양대안 김염순, 팔촌 동생 용진 영예 용술 길순 용녀 용순, 팔촌 제수 오복순 등이었다. 22명은 한 집안이었다. 이 중 아들 성곤은 불과 다섯 살로 대창에 죽임을 당했다.

"어머니는 예배당에서 살해됐습니다. 폭도들이 죽이고 불을 질렀죠. 아들 성곤이는 그때 할머니 품에 있다 불길을 헤쳐 나왔죠. 그런데 반동분자 씨를 말려야 한다며 죽였습니다. 두암교회 학생회장을 하며 노방전도에 열심이었던 용술이는 벌거벗겨진 채 살해됐고, 내게 몰래 음식 날라다 주던 우곤이는 대나무 숲으로 피신했는데 폭도들이 숲에 불을 질러 희생됐어요."

김용은은 전쟁 중 여덟 번의 죽을 고비를 겪었으나 살아났다. "내가 고향에서 그들 손에 잡혀 죽었으면 그 큰 희생이 없었을 턴데…. 비참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회상하곤 했다.

칼갈이 소리가 한동안 계속됐다. 순교자묘지 잔디에선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뛰놀았다. 작업을 마친 홍 목사가 김용은 목사의 회고 기록 한 줄을 내밀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다. 6·25 그 처참한 살육 현장에서 살아남은 나는 순교한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에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것, 그것 말고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 김용은 목사(1918∼2009)6·25 직후 군산중동교회 개척해 시무 전쟁 중에 어머니와 동생, 아들 희생

전북 정읍에서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나 이발소 조수를 하며 복음을 받아들였다. 15세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6형제 장남으로 가계를 이끌었다. 20대 초 외삼촌이 있는 일본 후쿠오카 철물공장에서 주경야독. 귀국 후 신앙생활을 하며 함남 흥남에서 알루미늄공장을 차려 돈을 벌어 금의환향. 1942년 무렵 신앙적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 거부로 박해받음. 광복 후 정읍제일교회 장로 등과 교회 개척해 38년간 시무하며 고군산열도 선교, 교도소선교, 노인 및 장애인 선교에 진력. 무주택 무토지 무통장의 3무신앙 실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역임.

■ '6·25 과부' 품은 다비다선교회 부역자 아내·자녀 등을 가족으로

두암교회 다비다선교회. 인민을 해방하고 노동자의 세상을 만들겠다던 공산당이 물러가고 우익에 의한 보복이 가해졌다. 문제는 좌익의 남은 가족이었다. 이른바 부역자 가족. 그 부역자의 아낙과 아이들을 누가 돌볼 것인가.

김용은 목사는 전쟁 직후 부역자 가족 살리기에 나섰다. 어머니와 형제를 죽인 원수의 가족도 있었다. "하나님 제가 그들을 용서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쉽지 않았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그의 어머니도 과부였다. 김 목사는 교인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다비다선교회'를 조직했다. 처음에 '과부'들은 보복하려는 게 아닌가 여기고 교회 나오길 꺼렸다. 그리고 이내 안심했다. 복음 안에 새로운 가족이 됐다.



정읍·군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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